2018년 1월 3일 수요일

자코메티 이야기/ 양희정 민음사 편집자 페이스북에서

15년 전 미국 소설가 니콜 크라우스 원고 『사랑의 역사』를 처음 접했을 때의 전율은 지금 떠올려도 감동적이다.

시인으로 등단한 전력 때문인지 니콜 크라우스의 글에는 군더더기가 없고, 문장마다 아름다운 의미 덩어리를 짊어지고 있어서 재차 읽어도 지루하지 않다.

그중에서 실존주의 조각가로 알려진 알베르토 자코메티에 관한 언급도 참 멋지다.

"엄마는 아빠와 처음 만났던 여름만큼이나 생생하게 아빠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 인생은 포기해 버렸다. (…) 조각가이자 화가인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머리만 그리려면 전신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줄리언 외삼촌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파리 하나를 그리기 위해 모든 풍경을 포기해야 한다. 처음에는 나 자신을 한정하는 것 같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하늘을 전부 가진 척하는 것보다는 모든 것의 6밀리미터만 갖는 편이 우주의 어떤 감정을 더 잘 붙들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엄마는 이파리나 머리를 선택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를 선택했고, 아빠에 대한 감정에 기대고 싶어서 이 세상 전부를 희생했다." —니콜 크라우스, 『사랑의 역사』에서

이런 글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대학원에서 미학을 공부했던 작가의 학문적 배경이 소설에 녹아 있는 것. 

소설의 주인공 꼬마 알마는 사춘기 애정 고민뿐 아니라 엄마의 외로움까지 감싸 안으려는 깜찍한 아이인데, 자고로 엄마가 자식을 충분히 보살피지 못하면 딸은 조숙해지는 법. 

어쨌든 알마는 엄마가 왜 자기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않는지에 대해 경험 없는 아이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서서히 깨달아 가고 있는 중이다. 

이 소설에서 알마의 정신적 성장은 그리움이라는 큰 감정선에 가려 자칫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여러 번 읽으면 꽤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실은 소설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자코메티 얘기를 하려다 보니 제일 먼저 니콜 크라우스가 떠올랐다.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알베트로 자코메티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데, 대표작 「걸어가는 사람」을 ‘묵상의 방’에서 볼 수 있다.

“무너져 내릴 듯 약하면서도 결의에 찬 모습이죠.” 파리 자코메티 재단 큐레이터 크리스티앙 알랑디트의 설명이다. “2차 세계대전을 겪고 난 유럽인의 초상, 나아가 인류 전체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끔찍한 일들을 겪고도 인간은 계속 걸어서 전진할 수밖에 없고 그래야 한다는 철학이 담겨 있는 것이죠.”

예술 작품이 나왔으니 미술평론가 이진숙 선생님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걸어가는 인간」이 탄생하기까지의 얘기를 들어보자.

"자코메티의 작품 역시 실패의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스물네 살의 젊은 자코메티는 어떤 인물을 외적으로 유사하게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러한 시도를 영원히 포기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 본질에 대한 탐색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은 오로지 인간만을 향했다. 다만 다른 방식이 필요할 뿐이었다. (…) 자코메티는 동생 디에고, 아내 아네트, 연인 캐롤린 등 몇몇 모델들을 앞에 두고 반복해서 작업을 했다. 동일한 대상을 반복해서 작업하는 것은 분명한 절망의 표현이었다. 만약 한 인물의 본질을 한 작품 안에서 모두 표현할 수 있었다면 더 이상 동일한 모델을 작업 대상으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시시포스의 신화처럼 매일 같은 인물의 두상을 붙잡고 씨름했지만 결국에는 마음에 들지 않아 대부분을 파괴해 버리는 일의 연속이었다. 마침내 십여 년 만에 자코메티가 도달한 것은 5센티미터까지 축소된 아주 작은 인물상들이었다. 덧없는 생명체의 허약함을 담아낸 듯 부서질 것 같은 작품들이었다. 작아짐으로써 인간은 한눈에 들어왔고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존재감은 너무나 미약했다. 후에 자코메티의 인물들은 조각적인 필요에 의해 비루하고 미소하지만 존재감 있는 형상으로 진화해 갔다. 길쭉한 인물들이 등장한 것이다. 부동의 자세로 서 있는 여인과 걸어가는 남자상이 완성되었다." —이진숙, 『롤리타는 없다』에서

사뮈엘 베케트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 준 『고도를 기다리며』가 1961년 파리 국립 오데옹 극장에서 공연될 때 무대디자인을 맡았던 사람이 바로 자코메티이다. 

“베케트와 자코메티의 시대는 그런 시대였다. 양차 세계대전을 연이어 겪은 죽음과 인간 상실의 시대, 실존주의 시대, 부조리의 시대.” 

같은 20세기 한국 땅에서 벌어졌던 박종철 사건을 담은 영화 「1987」을 보면서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반성이 든다. 

자코메티의 앙상한 가지가 어울리는 차가운 겨울, 인간을 향해 뜨거운 마음을 가져 보고 싶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1279363532&fref=n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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