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3일 수요일

조선일보의 기획기사-'글과 담 쌓은 세대'를 읽고

조선일보가 흥미로운 기획기사 시리즈를 내놓았다. 그것의 제목은 ‘글과 담 쌓은 세대’라는 것이다. 우선 이 시리즈의 첫머리에서 자라나는 세대의 ‘활자이탈(活字離脫)’ 현상을 먼저 지적하고 있다.

 

“인터넷과 TV, 게임과 휴대전화에 익숙해진 '활자이탈(活字離脫) 세대'의 학습·의사소통 능력에 비상이 걸렸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글과 책에서 멀어지면서 자기 생각을 전달하는 작문은 물론, 남이 쓴 글을 읽고 이해하는 독해 능력이 급속히 떨어지고 창의력과 사고능력·정서에도 악영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진단에는 별다른 이의가 없을 듯싶다. 그리고 자라나는 세대의 활자이탈 현상이란 한국만의 일도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의 본질을 어떤 문제의식으로 보고, 어떤 대응방안을 내놓을 것인가이다. 사실 일본의 경우에도 조선일보와 마찬가지로 보수적인 논조를 견지하고 있는 요리우리 신문에서 ‘21세기 활자문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참고, 활자는 표류하는 정보 세계의 닻)

 

주목되는 점은 ‘보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자라나는 세대의 활자이탈 현상은 우선 언어력, 특히 국어의 문제로 부각된다는 것이다. 일본의 ‘문자활자문화진흥법(文字・活字文化振興法)’의 경우에도 이 법의 기본이념을 밝혀놓고 있는 제3조의 2항에 “문자 활자 문화 진흥에서 국어가 일본 문화의 기반임을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고 국어(国語)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국어’가 있어야 ‘건전한 민주주의(健全な民主主義)’가 가능하다는 것. 그런 사고방식이 밑바탕이 되어 있다. (*주: 여기서 말하는 ‘건전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의 문제가 있다. 일본도서관협회가 ‘문자활자문화진흥법’의 제정 과정에서 이 ‘건전한 민주주의’라는 용어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음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는 정도로만 언급해놓고자 한다.)

 

조선일보의 시리즈 기사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어린이와 청소년의 ‘활자이탈’ 현상을 시리즈 기사의 첫 번째 기사로 다루고, 두 번째 기사에서는 ‘망가지는 청소년 언어 생활’을 다루고 있다. 이 두 번째 기사에서 중요한 코멘트는 이상규 전 국립국어원 원장의 말이다.

 

“이상규 전 국립국어원장(경북대 교수)은 "정확한 콘텍스트(context·문맥)를 따라 글을 읽지 못하기 때문에 어휘가 깨지고 문장이 부서지는 현상이 나타난다"며 "이렇게 되면 사고력과 창의력이 신장될 수 없고 심리적인 조울증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휘가 깨지고 문장이 부서지는 현상’의 원인이 과연 어떤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더 탐구해야만 한다. 이상규 교수가 지적한 대로 문맥에 따라 글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비문이나 은어, 비속어의 남용이 단지 ‘활자이탈’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언어사회학(Sociology of Language)의 관점에서 기성세대와 자라나는 세대 사이에 생겨나고 있는 언어 격차는 지속적인 논란거리다. ‘언어의 담벼락’을 두 번째 기사에서 말하듯 “활자를 멀리한 결과 논리적인 생각과 표현이 서툴러진 학생들이 자기들끼리만의 언어 세계에 빠져들면서 기성세대와의 높은 '언어의 담벼락'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단정은 조금 과장된 것이며, 견강부회(牽强附會)의 한 사례일 뿐이다.

 

이 시리즈를 어떻게 맺을 것인가, 궁금했다. 그런데 조선일보 답지 않게 핀란드 관련 기사가 이어진다. 핀란드가 강소국이며, 특히 PISA에서 줄곧 1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거론하면서, 독서 관련 통계를 내놓는다. “핀란드 교육부의 2007년 통계에 따르면 전 국민 530만명 중 1년간 한 번이라도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한 사람은 219만명(41.5%)이고, 이들은 연평균 46권씩 빌렸다.”는 것. 또한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에게 자동으로 지급하는 ‘산모 육아용품 세트’에 아기를 위한 책이 들어 있음과 함께 90% 이상의 핀란드 가정에선 매일 아이가 자기 전 1-2시간 동안 부모들이 책을 읽어준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또한 도서관 관련 소식도 있다. 인구 58만명인 헬싱키에 35곳의 도서관이 있고, 그 도서관 1층에는 모두 어린이 코너가 있다는 것.

 

그렇다면 해법은 나와 있는 것 아닌가? 독서를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기본적인 문화 인프라로서 도서관을 확충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책 읽어주기와 같은 책 읽는 문화의 형성, 핀란드에서 그러하듯 북스타트를 더욱 확장해나가는 것 등등이 해법일 것이다.

 

그런데 역시 조선일보 식의 결론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즉 신문 구독과 신문을 읽기자료로 활용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학교 또한 '읽기 교육'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많은 교사들은 신문이나 잡지를 보조 교재로 활용한다. 헬싱키 사범대 야리 라보넨(Jari Lavonen) 학장은 "읽기 능력은 기초적인 교육에서 매우 중요하며 '읽기 자료'의 사용은 문학·사회 수업에 국한되지 않는다"며 "핀란드에선 과학 교과에서도 학생들이 실험 내용을 사회 활동과 연관시킬 수 있도록 신문·잡지를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회적으로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에게 신문 구독을 장려하고 있다. 2008년 연구에서 29세 이하의 청년층에서 신문 구독자는 71%가 투표를 하고, 나머지는 투표율이 40%에 불과했다. 이 나라에서는 '신문 구독'을 '민주 시민'의 상징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신문 구독이 과연 민주 시민의 상징일 것인가. 신문읽기가 민주 시민의 상징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어떤 신문이냐고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신문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를 말해야만 하지 않은가?

 

‘글과 담 쌓은 세대’라는 조선일보 시리즈 기사를 읽으면서, 문득 2005년 연말의 일이 떠올랐다. 2005년이라는 시점이 무척 의미가 있는데, 내가 알기로는 이 무렵부터 한국의 종이신문들이 더 이상 구독자를 늘려나가지 못하게 된 시점이다. 신문 발행인들의 모임인 한국신문협회와 같은 데서 이 문제가 심도 있게 논의된 것으로 들었다.

 

그 무렵 몇몇 신문의 관계자들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독서 캠페인’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 때 내가 지속적으로 강조한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도서관 인프라 확충, 장서 확충, 정보와 지식에 대한 시민들의 접근성 강화, 북스타트와 같은 독서문화 확장 등등. 이런 일은 종이 매체라면 당연히 깊이 궁구하여 지속적으로 공익적 사업을 펼쳐나가야 한다는 것. 그런데 그 이후 조선일보가 기획해서 내놓은 것이 ‘거실을 서재로’와 같은 캠페인이었음은 우리가 다 잘 아는 사실이다. '거실을 서재로‘라는 캠페인을 보면서 역시 조선일보 답다는 생각을 했다. “도서관은 주민의 서재’라는 말이 있는데, 그 서재를 개개의 집에다 만들겠다는 구상! (왜 모든 집의 거실에 서재를 만들어야 하는가? 그렇게 서재를 만들 수 있는 거실을 가진 집은 또 얼마나 있을까?)  이 캠페인의 반대편에 '책읽는경향'이 있다고 감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내놓은 조선일보의 기획기사는 과연 어떤 식의 캠페인과 연결될까? 그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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