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3일 수요일

조선일보의 기획기사-'글과 담 쌓은 세대'-2

[글과 담 쌓은 세대] '크리(상황이 악화됨)', '병맛(어이없음)'… 입만 열면 인터넷 은어

 

[中] 망가지는 청소년 언어 생활
뜻풀이없인 알 수 없는 말들, 게임·방송 접하며 마구 사용
"자기들만의 '언어의 담' 쌓아… 부모·선생님들과 소통 불가"

서울 개봉역 주변의 한 PC방. 중·고교생과 나이 지긋한 중년 남성까지 약 20명이 모여 있는 PC방 안에서 자그마한 체구의 초등학생 송모(12)군이 눈에 띄었다. 옆 자리에 배낭형 책가방을 던져 놓고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은 송군은 '서든 어택'이라는 전쟁 게임에 빠져들었다.

"책이요? 그런 건 학교에서만 읽어요." 하루 1~2시간씩 인터넷 검색을 하고 텔레비전은 1시간 이상 본다는 송군이 그렇게 말했다. 수업 중에 읽은 교과서 빼고 올해 읽은 책 제목을 대 보라고 하니 "다 만화책인데 제목은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서울의 한 PC방에서 초등학생을 비롯한 청소년들이 인터넷 게임에 몰두하고 있다. 인터넷 공간에서 생산되는 ‘국어 파괴’는 아이들과 어른세대의 단절을 가져온다. /최순호 기자 choish@chosun.com
내용에 대해선 "공룡이 나오고…"라고까지 말한 뒤 2~3분가량 가만히 있었다. 머릿속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적당한 문장을 찾아내지 못했는지 "공룡이 나오고 그냥 그게 끝이에요"라고만 했다. 무슨 질문을 하든 답변은 단답형으로 끝났고, 무언가를 조리 있게 말로 설명하는 데 애를 먹는 듯했다.

활자를 멀리한 결과 논리적인 생각과 표현이 서툴러진 학생들이 자기들끼리만의 언어 세계에 빠져들면서 기성세대와의 높은 '언어의 담벼락'이 만들어지고 있다. '쩔다'(대단하다) '현시창'(현실은 시궁창) '시망'(시원하게 망했다) 같은 인터넷 은어로 의사소통을 해 부모·교사와 단절을 일으키는 것이다.

지난달 한국교총
이 내놓은 설문결과는 이 같은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병맛'(어이없음·'병신같은 말') '레알'(정말) '담탱이'(담임교사) '열폭'(열등감 폭발) 등 비교적 잘 알려진 청소년 은어·비속어 10개의 의미를 유·초·중·고교 교원 455명에 물었더니 5개 이상 맞힌 사람이 44%에 그쳤다. 66.1%는 학생들 대화의 반 이상이 비속어·은어·욕설이라고 답했다. 학생들의 언어가 망가진 원인으로는 인터넷(49.2%)과 방송·영화(34.2%)를 꼽았다.
한 청소년이 인터넷 카페 게시판에 올린 글. 개학하자마자 오후 10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이 시작돼 벅찬데 통학버스마저 만원이라 최악의 상황이라는 요지의 글인데, ‘젝일(제길)’ ‘째다(허락받지 않고 빠지다)’ ‘크리(상황이 악화됨·‘치명적인’을 뜻하는 크리티컬의 약자)’ 등 이상한 말이 많아 뜻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 /인터넷 화면캡처

인터넷 공간에서는 'ㄱㄱㅁ?'(어이없다) 'KIN'('즐'을 왼쪽으로 눕혀놓은 모양·짜증 나니 꺼져라는 뜻) '려차'(욕설을 뜻하는 영어 단어를 한글 자판으로 친 것) '개드립'(분위기를 망치는 즉흥대사나 연기) 등 설명을 듣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말들이 매일같이 쏟아지고 있다. 미국처럼 청소년들이 쓰는 은어를 해독하는 웹사이트가 필요하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국립국어원 김세중 공공언어지원단장은 "청소년들이 쓰는 은어를 게임회사에서 채택해 학생들이 게임을 하면서 이를 배워 확산되기도 하고, 방송에 나오는 비속어를 학생들이 받아들이기도 한다"며 "이렇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비속어·은어들이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과 담을 쌓은 학생들이 인터넷 게시판에 평소 쓰던 습관대로 또는 아무렇게나 적어놓은 말들을 다른 사람들이 따라 하거나 옮기면서 급속히 퍼져 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심지어 '빠릴'(빨리) '젭라'(제발) 등 자판을 잘못 친 단어마저 은어로 굳어지는 경우도 있다. 엉터리 단어가 표준어를 몰아내는 격이다.

'안습(안구에 습기차다, 안타깝다)' '흠좀무(흠 좀 무서운데)'처럼 기존의 조어(造語)구조를 파괴한 인터넷 은어들은 그저 한때의 장난처럼 무심히 볼 게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상규 전 국립국어원장(
경북대 교수)은 "정확한 콘텍스트(context·문맥)를 따라 글을 읽지 못하기 때문에 어휘가 깨지고 문장이 부서지는 현상이 나타난다"며 "이렇게 되면 사고력과 창의력이 신장될 수 없고 심리적인 조울증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당수 학생들은 표준말과 문법에 맞는 글에 대한 개념조차 잃어가고 있다. 서울시교육청 김승찬 장학사는 "중학교는 물론이고 고교에서도 자기 멋대로 쓰고 말하는 학생들을 자주 보는데 자기가 틀렸다는 것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조규익
숭실대 인문대학장은 "디지털시대의 아이들은 활자조차도 하나의 이미지로 바라볼 뿐 심리적인 낭독(朗讀)의 과정은 생략하고 있다"며 "그 결과 글을 쓰면 일상 언어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앞뒤가 맞지 않는 비문(非文)투성이가 되고, 의사소통이 부정확해져 '소통의 부재(不在)'현상이 일어나게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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