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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최초의 금속활자는 몽골과의 항전 속에서 피어난 보물이다. 고려는 1232년 천도를 단행한 뒤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 간 강화에서 고려의 문명을 한단계 더 높게 중흥시켰다. 이 기간 금속활자인 '증도가자'로 찍은 책들이 <상정예문>(1234), <증도가>(1239)이다. 강화는 염하에 둘러싸인 섬으로 물을 싫어하는 몽골군을 막기에 적합한 요새였다. 또 갯벌이 발달돼 있어 무사히 물을 건너 오더라도 갯벌에 빠져 참패할 우려가 있었다. 고려는 여기에 내성, 중성, 외성 등 3중성을 쌓아 몽골의 침입에 맞서 싸웠다. 광성보에서 바라본 염하 |
▲ '전'자 활자 |
▲ '복'자 활자 |
▲ 남명천화상송증도가 |
▲ 동국이상국집 |
▲ 갑곶돈대에서 바라본 염하 |
탄소연대 분석 고려 유물 결론 … 보물 문화재 신청
"고려라는 작은 나라가 감히 대몽골제국에 저항을 한단 말이냐, 너희들은 즉각 고려를 치러 떠나라, 만약 항복을 하면 살려주되, 저항을 한다면 살아 움직이는 것은 모조리 살육하라!"
원 태종 '우구데이'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1227년 칭기즈칸이 사망한 이후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장수들이 고개를 숙이며 충성을 맹세했다. 북중국의 패권을 장악한 '금'나라, 만주의 신흥국 '동진'까지 정복한 몽골제국이었다. 그런데 작은 반도국이 겁도 없이 항전을 결의하고 강화로 천도한 것이다.
고려의 강화천도 한 달 뒤인 1232년 8월, 몽골군은 대규모 기병을 이끌고 고려정벌에 나선다. 몽골군은 10월 개경을 휩쓸고 북한산성을 점령한다. 파죽지세는 그러나 거기서 끝이었다. 남쪽으로 계속 진격하던 11월 광주성(남한산성)에서 대패를 한 것이다. 광주부사 이세화의 지휘에 따라 성안으로 들어온 승려와 백성들이 죽기살기로 싸운 결과였다. 고려의 백성들은 성밖에선 농군이었으나 일단 성안으로 들어오면 용맹한 승병이 됐고 사나운 민병으로 변신했다.
고려인들은 퇴각하는 몽골군조차 곱게 보내지 않았다.
"슈-웅, 퍽!" 같은 해 12월 어느 날 광주성을 등진채 말을 타고 돌아가던 몽골의 수장 '살리타이'가 맥없이 고꾸라졌다. 살리타이에게 화살을 날린 사람은 승려 김윤후였다. 몽골항전을 비롯해 우리나라 전사에서 승려들은 승병이라는 이름으로 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려인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때, 고려에 대패한 몽골은 분풀이라도 하듯 '금'의 수도를 함락시킨다. 이후 또다시 고려를 침략, 1239년까지 충남, 전라, 경상도 지역을 휩쓸고 지나간다. 그러나 강화는 어찌하지를 못 했다.
고려는 밖으로는 전쟁을 하면서도 섬 안에서는 빛나는 문명을 계속 이어나갔다.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와 같은 '청자', '오백나한도'와 같은 '고려불화', '금속활자'인 '증도가자'가 그것이다. '증도가자'란 국가경영을 위한 매뉴얼인 <상정예문>(1234)과 부처님의 진리를 담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1239·이하 <증도가>)와 같은 책을 인쇄한 금속활자를 말한다. 구체적으로 고려가 개경(개성)에서 주조한 금속활자를 가리킨다. 알려진대로 <상정예문>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만 기록이 있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경우 '번각본'(飜刻本)만 남아 있는 상태다. 번각본이란 금속활자로 찍어낸 책자의 인면(印面)을 뒤집어서 목판에 새긴 뒤 이를 다시 종이에 인쇄한 것이다.
1239년 강화에서 발간한 <증도가>는 '보물 제758호'로 지정돼 현재 삼성출판박물관이 보관 중이다. 이 책의 발문은 '당대 권력자인 최이((崔怡, ? ~ 1249)가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11명의 각공들을 불러 금속활자본을 목판으로 번각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왕조는 1101년(숙종5년) 3월, 국자감 안에 '서적포'를 두고 책을 간행했다. 1232년 강화로 천도한 고려는 기존에 갖고 있던 주인술과 기술을 바탕으로 많은 책을 펴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역시 1251년 증도가자로 찍어낸 책이다. 목판본으로 간행한 책자는 <증도가>(1239), <남명천송증도가사실>(1247년, 3권 유존), <영가진각대사증도가>(1299) 등이 있다. 목판본 가운데 <증도가>와 <동국이상국집>은 기존의 금속활자본을 각각 뒤집어서 새긴 뒤 목판으로 찍어낸 번각본이다. 고려왕조는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한 뒤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흥덕사자'로 <직지>를 간행한다. <직지>는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의 줄임말이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금속활자는 개성의 개인 무덤에서 출토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한 '복'자와 개성 만월대 신봉문에서 발굴해 개성역사박물관이 보관 중인 '전'자 2개 뿐이었다. 그런데 지난 2010년 9월 2일 '증도가자'의 실물이 전격 공개됐다. 당시 경북대학교 문헌정보학과 남권희 교수는 국내외 기자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인사동 다보성미술관에서 고려시대 때 주조된 금속활자 실물 '증도가자'를 공개했다.
남 교수는 "다보성미술관이 소장한 고활자 100여점 중 12글자가 이미 그 이전에 금속활자로 찍어내 유통되던 판본을 고려 고종26년(1239년) 목판본으로 복각한 증도가의 글자와 대단히 비슷해 13세기 초에 나온 현존 세계 최고 금속활자인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그는 금속활자가 맞다는 근거를 서체가 같고, 활자의 높이와 각이 금속활자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고 덧붙였다. 기록으로만 존재했던 실물활자가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후 2011년 6월 학술대회, 2012년 2월 국제학술대회를 각각 개최하는 등 공개된 '증도가자'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다. 논쟁의 핵심은 '진품'이냐 아니냐는 것이었다.
관계 전문가와 전문기관은 '증도가자'에 대한 학술적·과학적 조사·연구·검증을 거쳐 고려시대 주조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라고 결론지었다. 이는 목판번각본 <증도가>와 비교해 글자 모양과 크기가 거의 일치하고 활자의 형태와 금속성분, 잔류 먹의 탄소연대가 고려시대로 나온 데 따른 것이다. 이 증도가자는 현재 '보물'신청을 한 상태로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증도가자의 진위여부를 떠나 존재했었다는 '사실'이다.
/글·사진=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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