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23일 월요일

프랑스 농민이 외치는 ‘신토불이’/시사in 최현아 편집위원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2682

프랑스 수도 파리의 도심이 소, 돼지, 닭 같은 가축 4000여 마리로 들썩였다. 지난 2월21일부터 9일 동안 베르사유 박람회장에서 열린 ‘제52회 농업박람회’ 때문이다. 패션과 예술을 사랑하는 세련된 이미지의 파리 시민들이 도심 가운데 펼쳐진 시골 풍경에 열광했다. 3900㎡에 이르는 광대한 박람회장이 행사 내내 시민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어린이들은 도시에서 구경하기 힘든 소와 당나귀, 말 등을 동물농장에서 만나 어루만지고 먹이도 주었다. 성인을 위한 행사도 준비되어 있었다. 관객들은 박람회장에 출품된 동물 330여 종을 구경하면서 동물별로 가장 잘생긴 가축을 선정하는 경연에 즐겁게 참여했다. 행사 참여 농민들의 장기자랑도 볼만했다. 돼지로 분장한 한 양돈 농장주는 돼지 울음소리를 기막히게 흉내 내서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는 유럽 최대의 농업국가다. 전통적 농업 강국이기도 하다. 따라서 농업에 대한 시민들의 애정이 남다르다. 그래서인지 농업박람회는 정치인들이 필수적으로 찾는 행사다. 더욱이 오는 3월 말(22일과 29일)로 예정된 지방선거 때문에 정치인들은 더욱 절박한 심정이다.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사회당)은 박람회 첫날 행사장을 찾아 축산업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제1야당인 대중운동연합(UMP·중도우파) 대표인 사르코지 전 대통령도 박람회장을 찾았다. 극우 국민전선(FN)의 마린 르펜 총재도 농민들을 만나 지지를 호소했다. 국민전선에 대한 농민들의 지지율은 계속 상승 추세인데,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19.5%에 이르고 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AP Photo</font></div> 2월21일 파리 베르사유 박람회장에서 열린 농업박람회. 관람객들이 양을 관람하고 있다. 
ⓒAP Photo
2월21일 파리 베르사유 박람회장에서 열린 농업박람회. 관람객들이 양을 관람하고 있다.

이번 농업박람회를 통해 드러난 이슈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환경 문제다. 프랑스의 축산 부문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 규모가 다른 나라보다 훨씬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 산업이 배출하는 온실가스 가운데 농업의 비중은 세계 평균 15% 정도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20%에 달한다. 더욱이 올해 12월에는 파리에서 유엔기후변화협약 총회(COP21)가 열릴 예정이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킨 문제가 있다. ‘프랑스 농업이 미래에도 하나의 독립된 산업으로 유지될 수 있느냐’ 하는 논란이다. 이를 두고 전반적 회의가 확산되고 있다.

농업은 프랑스에서 항공, 명품, 운송장비 등과 더불어 국제 경쟁력을 갖춘 부문으로 꼽히는 산업이다. 무역에서도 농산물 및 식품은 꾸준히 흑자를 기록 중이다. 프랑스의 농산물 가공 기업들이 내수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0% 정도다. 이런 업체들이 사용하는 원료 가운데 70%는 프랑스 국내 농가에서 공급된다. 프랑스 농업이 2013년에 기록한 총매출은 무려 737억 유로(약 90조원)에 달한다.

그러나 이런 프랑스 농업 역시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2014년은 특히 악몽의 해였다. 곡물 가공품인 시리얼의 원료를 생산하는 농가의 경우, 2014년 매출액이 전해 대비 40%나 감소했다. 이상기후와 함께 유럽연합(EU)과 러시아 간 외교적 충돌로 인해 EU산 우유·채소·육류 등의 러시아 수출이 지난해 8월부터 전면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2월25일 ‘프랑스 엥테르(France Inter)’ 라디오 방송에서 방송된 르포에 따르면, 프랑스 농가는 거의 몰락 직전이다. 프랑스 북서부의 농업 지대인 마이엔은 평균적으로 매년 10억 유로가량의 농식품 매출액을 기록해왔다. 그런데 이곳 농민들의 경영난이 본격화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무려 1300여 농가가 금융기관으로부터 부도 처리를 당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EPA</font></div>3월 말 지방선거를 앞두고 FN의 마린 르펜 총재(오른쪽) 등 정치인들도 농업박람회장을 찾았다. 
ⓒEPA
3월 말 지방선거를 앞두고 FN의 마린 르펜 총재(오른쪽) 등 정치인들도 농업박람회장을 찾았다.

대농장 중심으로 재편성된 농촌의 ‘위기’ 


마이엔의 농민인 마크 씨 가족은 사실상 노숙 생활을 하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우유와 시리얼 가격이 하락하면서 매출액 급감을 겪다가 가축 전염병으로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결국 부도를 냈다. 은행 대출은 막히고 생활비도 없다. 가족들은 지난 몇 개월 동안 무료 급식소에서 허기를 채워왔다. 일곱 살인 딸은 제대로 씻지 못해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고 있다. 농촌 생활을 시작할 때 꽤 부유했던 마크 씨는 현재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어떤 농민들은 ‘투잡’으로 생활비를 마련하고 있다. 주중에 운전기사를 하는 식이다. 

막다른 곳으로 몰린 농민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잦다. 공중보건 감시 연구소(L’institut de veille sanitaire)에 따르면 프랑스 농촌에서는 이틀에 한 명꼴로 농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같은 통계는 프랑스 농업의 기반이었던 가족 중심 소농장의 운명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2003년부터 2010년 사이 10㏊(약 3만 평) 미만의 소농장(가족 단위로 운영)은 4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반면 기계화·기업화된 대농장은 점점 더 존재감이 커지고 있다. 프랑스의 전체 농업 중 대농장(143㏊ 이상)의 비율은 이미 10%에 이른다. 이런 기업 형태의 대농장이 프랑스 농토의 50% 정도를 소유하고 있다. 그만큼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줄었다는 말도 된다.

이처럼 대농장 중심으로 농촌이 재편성된 까닭은 무엇일까? EU 차원의 농업 지원정책이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어로 풀어보면 ‘코뮌(시·읍·면)을 위한 농업정책(PAC)’이다. PAC의 주요 사업은 보조금 지원이다. 그런데 경작 면적이 클수록 더 많은 지원금을 제공하도록 되어 있어서 농장 규모의 확대를 부추겼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올해부터 PAC 정책의 이 같은 폐해를 개선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낙농품 쿼터제(낙농가 수입의 보장을 위해 우유 등의 공급 제한으로 일정 수준의 가격을 유지하는 제도)가 폐지되는 등 농산물 시장 자유화가 계속 진행 중이어서 대농장의 우세가 갈수록 강해질 것이라는 염려도 나온다. 은행들 역시 대농장에만 대출할 뿐 소농들에겐 관심을 끊었다.

이처럼 농촌의 위기가 점점 심각해지면서, ‘프랑스 농업경영인 총연맹(FNSEA)’은 교육기관·기업 등에 프랑스 농산물을 소비해달라고 호소하는 중이다. 중앙정부에도 ‘세 끼 중 두 끼는 프랑스 농산물로’라는 취지의 국가적 캠페인을 요청하고 있다.

일부 농민단체는 대농장 경영이라는 ‘대세’에 정면 도전하는 방식으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대농장 경영은 환경적으로나 경제적 지속성 측면으로나 문제가 많다. 오히려 농장 규모를 줄여야 축산에 따른 공해 요인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으며 먹을거리의 질도 높일 수 있다. 전통적인 소규모 환경친화적 농장으로 위기를 타개하겠다는 노선이다. 이 운동을 주도하는 대표적 단체로는 ‘농민연맹’이 있다. 농민연맹 조합원들이 사육할 수 있는 가축 수는 단체 측의 지침에 따라 엄격히 제한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프랑스 정부의 의지다. 사라져가는 프랑스 농가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 이를 둘러싸고 프랑스 내에서도 격론이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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