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30일 월요일

[책과 출판의 문화사]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핏빛의 르네상스/전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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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출판의 문화사]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핏빛의 르네상스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 서유럽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겠다며 여덟 차례에 걸쳐 일으켰던 십자군 전쟁은 참혹한 대실패로 끝났다. "신이 인도하여 주시리라" 믿었던 성전(聖戰)에서 패배한 그리스도교 진영은 커다란 혼란에 휩싸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4세기에 유행했던 흑사병은 봉건제의 하부구조를 지탱했던 낡고 폐쇄적인 장원경제를 붕괴시켰다. 전염병으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농민들은 더 나은 노동조건을 찾아 다른 도시로 이동하였다.
 
14세기 이후, 유럽의 봉건질서는 총체적인 위기 상황이었다. 한 가지 위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아시아와 이슬람보다 낙후되고 정체되어 있던 서유럽에 드디어 문명의 불꽃이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십자군 전쟁의 길목이자 배후지 역할을 담당하였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피렌체, 나폴리 등 상업도시들은 이슬람으로부터 새로운 천문학과 지리학 등 발달한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르네상스는 14~16세기에 일어난 문화운동으로 학문이나 예술의 부활·재생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세의 혼돈은 인간 정신의 동요를 가져왔고, 파국의 연쇄는 새로운 사회적·경제적 관념을 탄생시켰다. 우리는 흔히 르네상스 하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롯해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브루넬레스코 같은 르네상스의 천재들이 남긴 위대한 예술작품을 먼저 연상하지만, 르네상스는 절대 평화롭지 않았다. 그리스도교 세계의 분열 이후 종교전쟁의 외피를 쓴 절대왕정의 처절한 정복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지중해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지만 수많은 도시국가로 분열된 이탈리아는 뜯어먹기 좋은 빵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르네상스는 이탈리아보다 중·북부 유럽에 있어 더욱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서구가 십자군전쟁을 통해 이슬람문명을 수용했던 것처럼 알프스 이북의 유럽은 침략전쟁을 통해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워낙 완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중·북부 유럽은 문화나 예술보다는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측면에서 르네상스를 수용했고, '종교개혁'이라는 형태로 르네상스를 치르게 되었다. 르네상스는 알프스 산맥을 경계로 남쪽은 문화와 예술을, 북쪽은 활판인쇄의 전파를 통해 고전 문헌 연구를 중심으로 지식탐구가 주축을 이루게 되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통해 부도덕하더라도 더 큰 목적(국가)을 위해 책략과 용기를 발휘할 수 있는 결단력과 뛰어난 지성을 갖춘, '사자의 힘과 여우의 책략'을 지닌 군주를 요구했던 것도, 국가의 생존강화를 목적으로 권력이 법·윤리·종교보다도 우선해야 한다는 국가이성(reason of state)을 주장했던 것도 이런 난세를 극복할 수 있는 통일 이탈리아를 염원했기 때문이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역시 천재적인 예술가 이전에 소수의 병력으로 중·북부 유럽의 대군을 상대할 수 있는 전쟁병기를 개발하기 위해 날밤을 지새운 발명가였다. 이런 상황을 서양에서는 '르네상스'라 부르고, 동양에서는 '춘추전국시대'라 했고, 이런 사람들을 서양에서는 '천재'라 불렀고, 동양에서는 '제자백가'라 부른 차이가 있었다. 물론 시기적으로는 동양이 2000년 이상 빨랐다.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성공회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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