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30일 월요일

'책과 출판의 문화사' ⑤ -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의문/ 음독(音讀)과 묵독(黙讀)/전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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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출판의 문화사' ⑤ -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의문>

음독(音讀)과 묵독(黙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4대 교부(敎父) 중 한 명으로 헬라철학과 그리스도교 교리를 통합시킨 교부철학의 대가이자 최고의 논객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젊은 시절은 그리스도교와 거리가 멀었다. 제국의 중심 로마의 지식인들에게 초기 그리스도교는 변방의 유대인 목수 아들을 섬기는 투박한 종교에 불과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교 대신 마니교에 빠져 음행(淫行)을 일삼았지만, 그가 마니교에 빠져든 이유 중 하나는 불멸의 지혜를 탐구하려는 열망 때문이었다. 그의 오랜 방황은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어린 설득과 당시 밀라노의 주교이자 최고의 신학자였던 암브로시우스를 만나 그리스도교로 귀의하면서 끝났다. 

 한때 로마의 집정관을 지냈을 만큼 뛰어난 학식과 인품을 고루 갖추고 있던 암브로시우스는 지적 갈망에 목말라하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었다. 그의 탁월한 설교와 신심 어린 처신은 오랫동안 아우구스티누스를 괴롭혀 왔던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교회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시켜주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따랐지만, 그의 책 읽는 습관만큼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의 의문은 대단한 독서가였던 암브로시우스가 책을 읽을 때, 소리 내어 읽지 않고(音讀), 눈으로만 읽는다(黙讀)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책을 읽을 때 그의 두 눈은 책장을 뚫어져라 살피고 가슴은 의미를 캐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혀도 움직이지 않았다"며 스승의 기이한 독서법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묵독이 일반화된 현대에는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지만, 고대의 독서법은 서당에서 "하늘 천 따지 가마솥에 누룽지"를 외치는 학동들처럼 음독이 기본이었다. 플라톤 시대의 그리스인들에게 문자란 그 자체로는 불완전한 것이었기에 기록된 문장(text)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소리 내 읽는 것이 필수(음독이 텍스트 안에 내재)적이라고 여겼다. 이런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교회 내부에 말씀전례(Liturgia Verbi) 형식으로 남아있다. 현실적으로 음독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띄어쓰기나 맞춤법, 문장부호가 없었기 때문에 소리 내서 읽지 않으면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낱말 사이에 여백을 넣어 읽는 것을 구두법(句讀法)이라 하는데, 글에서 뜻이 끊어지는 곳인 구(句)와 구 가운데 읽기 편하게 끊는 곳을 일컫는 두(讀)가 발전하면서 7세기경부터 서양에 묵독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묵독은 책 읽는 속도를 배가시켜주었고, 깊이 있는 독서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묵독이 점차 증가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수도원에서 귀중품인 책을 보관할 때 쇠사슬에 묶어 두었기 때문이다. 쇠사슬에 묶인 책을 읽기 위해 수도사들이 모여 각자의 책을 소리 내 읽는 것은 소란스럽고 불편한 일이었다. 묵독이 일반화되면서부터 도서관은 점차 침묵이 지배하는 엄숙하고 성스러운 장소로 변화하게 되었다. 11세기부터는 묵독이 일반화되었고 독자들은 더 이상 타인의 눈과 귀를 신경 쓰지 않고도 지적 호기심의 근원을 완전한 자기 통제 아래 둘 수 있게 되었다. 은밀한 독서가 가능해지면서 저자와 독자 모두 점차 대담해졌으며 비로소 생각의 자유가 시작되었다.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성공회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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