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 강화도의 금속활자본인 <상정예문>,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맥은 고려왕조의 개경 환도 이후에도 계속된다. 그 중 지금까지 현존하는 최고 금속활자본으로 알려진 <직지심체요절>은 고려왕조가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한 100년 뒤인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한 금속활자본이다. 사진은 <직지심체요절>을 찍어낸 청주시 운천동 흥덕사 전경. |
▲ '직지' 영인본 및 해설서 표지. |
▲ 청주고인쇄박물관의 겨울 풍경. 이 박물관은 청주 흥덕사터 옆에 지어졌다. |
현재 프랑스국립도서관 '하권'만 소장
1232년 강화로 천도해 39년 간 대몽항쟁을 벌인 고려는 1270년 결국 개경으로 환도한다. 이후 고려는 몽골의 부마국이 되지만 고려의 민족고유성, 독자성, 자주성은 지켜나간다. 인쇄문화의 역사가 계속된 것은 물론이다.
지난 1983년 12월. 청주대학교 박물관이 '운천동 사지발굴조사'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당시 발굴조사단은 운천동 철터 서남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연당리 가강골 마을 515의 1 민묘 주변에서 고려시대 유물을 발견한다. 치미편과 연화문이 새겨진 와편이 나온 것이다. 화강암으로 잘 다듬은 원형과 방형의 초석 3기도 출토됐다.
당시 조사담당인 박상일 연구원은 운천지구택지개발사업 구역에 포함된 이 지역을 보존하고 발굴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올린다. 1985년 1월 충청북도는 절터 발굴을 위해 한국토지공사에 공사 중지를 요청한다. 그러나 공사를 강행하는 바람에 절터 중심인 '금당지'를 비롯해 절터와 유규가 상당 부분 유실된다. 이에 충북 문화재위원회가 1985년 3월 절터 긴급 발굴을 결의했고 청주대학교 박물관이 전면 발굴조사에 들어간다. 발굴조사를 거의 끝내고 주변을 정리하던 1985년 10월8일, 택지공사로 훼손된 사지 동쪽에서 '흥덕사'라고 선명하게 음각된 청동 금구 파편이 발견된다. 1377년(고려 우왕3년)에 <직지>를 금속활자로 인쇄한 흥덕사터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이 청동금구 파편엔 '甲寅五月 日西原府興德寺禁口壹坐…'(갑인5월 일서원부 흥덕사 금구 일좌…)란 글이 써 있었다. 이는 <직지> 하권의 맨 끝장에 써 있는 '宣光七年丁巳七月 日 淸州牧外興德寺 鑄字印施'(1377년 7월 청주목 교외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하여 펴냈다)란 기록과 '흥덕사'란 절 이름이 일치하는 것이었다. 청주목이란 명칭까지 나왔으므로 이 절터는 곧바로 <직지>를 간행한 흥덕사지란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일부에서 '흥덕사'라 새겨진 금구 조각 하나로 흥덕사지로 단정할 수 있느냐는 문제를 제기했다. 충청북도와 청주대 박물관은 다시 정밀조사를 벌였고 '청동보당용두' 2점을 비롯해 승려들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사발 등 여러 점의 청동유물을 찾아낸다. 이중 청동불발의 구연부 외측면에서 '황통십년경오사월 일 흥덕사의 지중대사령인왕생정토지원 불발일합구급운구입중이근이양인'이란 40자의 명문이 발견됨으로써 흥덕사지임이 재확인 된다. 이후 흥덕사지를 처음 확인해준 '흥덕사'명 금구편의 나머지 몸통부분이 발견됐고, '갑인5월에 서원부 흥덕사에서 금구 1좌를 다시 주조했는데 32근이 들어갔다'는 전체의 명문이 드러났다.
금속활자본 <직지>는 처음 상·하 2권으로 간행됐다. 그러나 하권만이 프랑스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이 소장하는 중이다. 책 표지엔 '直指 下'(직지 하)라고 쓴 제목이 세로로 써 있고 오른쪽에 프랑스어로 '이 책은 1377년에 금속활자로 인쇄한 가장 오래된 한국의 책'이라고 적혀 있다. 책에 쓰여진 종이는 '닥나무'로 만든 '고려지'를 사용하고 있으며, 책 5곳에 구멍을 뚫어 붉은 실로 묶은 '오침안정법'의 선장본 형태를 하고 있다.
<직지>는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의 줄임말이다. 전북 정읍 출생인 백운화상 '경한'이 제자 법린과 함께 선(禪)의 요체를 깨닫는데 필요한 내용을 뽑아 만든 불교서적이다. 사람이 마음을 바르게 다스리면 그게 곧 부처의 마음임을 깨닫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직지>의 가치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는 데 있다.
<직지>가 프랑스에 있는 이유는 주한프랑스 초대공사 빅토르 꼴랭 드 쁠랑시(Victor Collin de Plancy, 1853~1922) 때문이다. 그는 파리대학에서 법학을, 동양어학교에서 중국어를 공부했으며, 1888~1891년 주한프랑스 초대공사를 지낸 인물이다. 한국에 오랫동안 근무한 쁠랑시는 조선의 책과 골동품 등을 수집해 자신의 모교인 동양어학교에 보냈다. 1896~1906년 13년 간 한국에 머물기도 했는데, 중국어 통역관 출신인 그는 한문으로 된 책을 읽을 수 있었으므로 <직지>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직지>가 세상에 공개된 때는 1900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만국박람회에서다. 그 뒤 모리스 꾸랑의 <한국서지>에 수록된다. 쁠랑시는 1906년 태국의 프랑스 공사관에서 공사로 근무하다 1907년 은퇴하며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는 1911년 자신이 갖고 있던 한국, 중국, 일본과 관련한 소장품 883점을 경매시장에 내놓는다. 이때 골동품 수집가인 앙리 베베르(Henry Vever, 1854~1943)가 180프랑에 <직지>를 사들인다. 1943년 눈을 감은 앙리의 유언에 따라 <직지>는 1952년 프랑스국립도서관(리슐리외)에 기증된 이래 지금까지 도서번호 109번, 기증번호 9832번으로 프랑스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보관 중이다.
2015년 1월, 청주시 운천동 청주고인쇄박물관에 겨울바람이 불어온다. '흥덕사' 터가 밝혀지면서 설립한 박물관이다. 박물관에 들어가 우리나라 활자의 역사와 전시물을 돌아보고 나와 박물관 한켠 경사진 길을 오르자 탑과 사찰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복원한 '흥덕사' 건물이 새파란 겨울 한 가운데로 우뚝 솟아 있다. 건물 주변으로 시민들이 산책을 하는 중이다. 멀리서 박물관과 흥덕사를 찾은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들려온다. 겨울하늘에 울려퍼지는 아이들의 푸른 웃음소리.
/청주=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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