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30일 월요일

시간과 공간의 대결-점토판(tablet)과 파피루스(papyrus) 책과 출판의 문화사/전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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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사회를 통해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 인류는 사제와 정복자라는 지배계급도 덤으로 얻게 되었다. 지배계급은 세금을 거두고, 법률과 계약서, 종교적 포고 등을 위해 기록의 보존이 필요했고 그로 인해 문자가 출현하게 된다.  

기원전 4000년에서 3000년 경에 나타난 세계 4대 문명은 모두 농경과 수운에 유리한 강을 끼고 발달했다. 그중에서도 인류 역사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메르(Sumer)인들은 기원전 약 3100년경 수(數)를 발명했고, 이와 거의 동시에 문자를 발명했다. 이들은 주변의 흔한 재료인 점토판(tablet)을 이용해 언어를 기록했다. 종이가 등장하기 전까지 문자를 기록하는 매체는 수메르인처럼 점토판이나 동물 가죽, 뼈, 잎사귀, 떡갈나무 껍질, 조개, 비단과 면화, 뼈, 거북 등껍질 등등을 사용했지만, 양피지와 종이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점토판과 파피루스(papyrus)였다.  

오늘날의 영어에는 고대의 책 문화에서 출발해 현재까지 사용되는 용어들이 있는데, 수메르인들이 점토판에 설형(쐐기)문자를 새기는 도구였던 스타일러스(stylus)는 현대의 태블릿PC에서도 같은 용도와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 말에서 고정된 문체나 양식(樣式)을 뜻하는 스타일(style)이란 말이 나왔다. 영어에서 '쪽(page)'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낱장(leaf)'이란 단어는 나무 '잎사귀(leaf)'에 글을 썼던 흔적이 남은 것이고, '도서관(library)'이란 말도 나무껍질의 안쪽을 뜻하는 라틴어 'liber'에서 나왔다. '책(book)'은 앵글로색슨 어로 나무껍질을 의미하는 'boc'에서 출현했고, '종이(paper)'는 잘 알려진 대로 이집트의 파피루스에서 왔다. 그리스어로 파피루스를 뜻하는 '비블로스(byblos)'에서 성서를 뜻하는 말 '비블리아(Biblia)'가 나왔고, 여기에서 다시 '책 중의 책(Bible)'이란 말과 서지학(書誌學)을 뜻하는 '비블리오그라피(bibliography)'가 출현했다.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일찍이 "인쇄술의 출현이 비-문자언어로서의 건축을 죽였다"고 말한 바 있는데, 고대 문명이 남긴 위대한 서사시들도 각기 어떤 매체에 기록되었느냐에 따라 다른 길을 걸어야 했다. 인류 최초의 역사가 시작된 수메르 문명이 남긴 위대한 서사시 <길가메시>는 <성경>과 <그리스로마신화>에 기록된 대홍수와 방주, 바벨탑 이야기의 원형질을 이루는 신화였다. 그러나 <길가메시>는 <성경>이나 <그리스로마신화>와 달리 1872년 대영박물관에서 근무하던 조지 스미스(1840~1876)가 판독해내기 전까지는 존재조차 알려지지 못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문자 도입 이전까지 신화는 구전을 통해 전해졌지만, 문자 출현 이후 수메르 문명은 점토판에 이집트와 그리스 문명은 파피루스에 기록했다. 점토판은 시간을 견디는 힘(내구성)에 장점이 있으나 기록의 전달과 전파에 한계가 있었고, 파피루스는 시간을 견디는 힘은 약했으나 지식의 공간을 넓히는, 지식과 정보의 전파에 커다란 장점이 있었다. 다시 말해 점토판에 기록되었던 <길가메시>는 그 이야기가 처음 만들어진 지역 주변을 벗어나지 못한 채 남겨져 있어야 했던 반면, 파피루스에 기록되었던 <성경>과 <그리스로마신화>는 더 널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성공회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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