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30일 월요일

[책과 출판의 문화사] 구텐베르크는 왜 파산했을까? /전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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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출판의 문화사]  
구텐베르크는 왜 파산했을까? 

요한 겐스플라이시, 이른바 '구텐베르크'는 14세기 말 경제적으로 활기를 띠고 있던 교역도시 마인츠의 금은세공사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에 대한 사료가 많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1434년부터 1444년까지는 스트라스부르에서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그는 거울로 만든 성지순례 기념품을 제작해 판매하는 등 다양한 상품 개발에 진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인쇄술과 관련한 연구들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연대를 정확히 추정할 수는 없지만, 이 무렵 그는 처음으로 기도전례서와 책력들을 인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구텐베르크는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바로 성서의 인쇄였다. 그러나 성서 인쇄를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다. 구텐베르크는 여러 자본가들을 물색한 끝에 요한 푸스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인쇄술 발명에 들어갈 막대한 비용-종이와 양피지, 잉크 구입, 활자 주조, 직공의 급료 지불 등-을 감당했다. 푸스트는 재정 이외의 일에도 관여했는데, 페터 쇠퍼로 하여금 구텐베르크의 발명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도록 했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종갓집 손맛을 딸이 아닌 며느리가 물려받듯 유럽에서는 장인이 아들이 아닌 동업자 관계에 있는 사위에게 가업을 물려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푸스트와 쉐퍼 역시 장인과 사위 관계였다. 

1452년부터 3년여 동안 고생한 끝에 구텐베르크는 드디어 <42행(行) 성서>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 성서를 제작하는 데 부호를 제외하고도 대략 300여개가 넘는 상이한 활자들이 필요했다. 구텐베르크는 160권에서 180권 정도의 성서를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 30권은 값비싼 양피지에 인쇄한 것이었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와 성서 인쇄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는 현재까지 남아있는 50여권의 성서 인쇄본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그가 만든 금속활자는 전례용 필사본에 사용됐던 고딕체에서 따온 것들이었다. 그는 성서 인쇄본이 손으로 쓴 필사본의 아름다움에 비견되길 바랐기 때문에 각별한 공을 들였고, 그 덕분에 필사본에 버금갈 만큼 아름다운 책이 만들어졌다. 인쇄 상태가 얼마나 훌륭했던지 거의 700여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어쩔 수 없이 파손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를 읽어낼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정확한 판매부수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구텐베르크 성서는 상당히 잘 팔렸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벌고 뒤로 밑진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초기 투자액을 회수하기엔 여전히 부족했다. 실망한 쇠퍼는 1445년 말 구텐베르크에게 소송을 걸었고, 모든 계약을 파기했다. 이후 두 사람은 결별하고 각자의 인쇄소를 경영했다. 어떤 이들은 쇠퍼가 구텐베르크에게 인쇄술을 빼앗기 위해 일부러 소송을 벌인 것으로 짐작하지만, 당시 유럽의 문맹률, 필사본보다 값이 싸졌다하더라도 인쇄된 책이 여전히 고가품이었던 점을 생각해본다면 수요가 증대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어쩌면 그런 까닭에 구텐베르크는 이후 성서보다는 면죄부 인쇄에 더 공을 들이게 되었을 것이다. 성서 인쇄보다 면죄부 인쇄가 훨씬 남는 장사였다는 것은 이후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성공회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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