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5일 일요일

국제신문 기획시리즈 -기억하라 그날의 함성〈 1 〉 항쟁의 前夜 `부산양서조합` 2004년 10월 4일

기억하라 그날의 함성〈 1 〉 항쟁의 前夜 `부산양서조합`

부마항쟁 싹틔운 민주화세력의 사랑방

良書 매개로 한 협동조합 '문화공동체' 성격

김형기목사 주도 78년발족…盧대통령 가담

항쟁배후 몰려 10·26뒤 계엄사 강압적 해체


1979년 10월 20일 군경합동수사단이 있던 부산 망미동 삼일공사 취조실. 사나흘전 부산과 마산에서 발생한 대규모 민중시위의 배후 조종자로 군경이 지목한 김형기(52·현 경주 팔복교회 담임목사)에 대한 취조가 이뤄지고 있었다. 군수사관들은 눈엣가시처럼 돼 있던 부산양서협동조합(부산양협)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아, 여기서 내가 죽겠구나." 김형기의 눈앞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는 비장한 심정으로 취조에 임했다. 박정희를 욕하며 악다구니도 썼다. "잠을 안재워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조사실 책상위에 있는 서류를 보니 계보가 그려져 있었는데, 내가 중간 총책이 돼 있는 겁니다. 문득 인혁당 사건이 떠올랐어요. 1974년 주동자 8명이 사형당한 사건이죠."

시위 뒤끝의 계엄 정국은 살벌했다. 수사과정에서 가혹행위가 자행됐다. 군경은 부산양협의 중심 인물들을 굴비 두름 꿰듯 간첩으로 엮고 있었다. 부산양협의 조합원 일련번호는 간첩 고유번호로, 조합원 이름은 지하조직의 계보로 꿰맞춰졌다.

그런데 믿기지 않는 상황이 일어났다. 그해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유신의 심장'을 쏜 것이다. 7년 유신체제와 18년 박정희 철권통치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정국은 급변했다.

#부산 운동세력의 사랑방

부마민주항쟁을 말할 때 특별히 기억해야 할 것이 부산양협이다. 양협이 없었다면 부마항쟁의 함성은 애초 기대하기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양협은 지금의 협동조합과 유사하지만, 70년대 당시로선 아주 생소한 개념이었다. 이미 몇년 전 서울 협동교육연구원에서 신협 지도자 훈련을 받으면서 이 개념에 매료됐던 김형기는 책을 매개로 한 새로운 문화운동을 구상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김형기는 75년 출옥, 모든 자격이 정지된 상태에서 지인의 소개로 김광일(전 청와대 비서실장)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원으로 일하게 된다. 그때 그는 부산 중부교회 대학생부를 지도했다.

김 목사가 주목한 것은 '안티고니쉬 운동'. 캐나다 동부 연안 노바스코샤주의 안티고니쉬 지방에서 전개된 모범적 협동조합운동을 부산판으로 만들고자 시도했다.

김목사 등 주도세력들은 1977년 11월 16일 부산양협을 발기하고 정식명칭을 '부산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으로 정했다. 이듬해 4월 8일 창립총회를 열었고 22일에는 부산 중구 보수동 책방골목에 직영서점인 '협동서점'을 개점했다.

누구든 출자금 1000원과 가입금 1000원만 내면 가입할 수 있고, 출자액에 관계 없이 조합원 1명의 투표권은 1표로 했다. 정치·종교적 중립을 지키고 조합원 교육을 통해 지역사회에 공헌한다는 운영원칙을 세웠다.


#알만한 인사들 대거 참여

부산양협은 빠르게 성장했다. 창립 당시 107명이던 조합원은 1978년 말 300여명, 79년 10월에는 570여명으로 불어났다.

당시 부산양협 전무를 맡았던 김희욱(54·부산 해연중 교사)씨는 "경직된 사회환경 속에서 고뇌하던 학생들과 지식인들에게 합법적, 점진적 운동공간을 마련한 것이 빠른 성장의 배경이었다"고 회고했다.

부산양협에는 부산의 민주화 인사 거의 대부분이 참가하고 있었다. 이흥록(당시 조합장) 변호사를 비롯, 영락교회에 있던 박현삼 김희욱 최준영씨가 참여했고, 부산의대 김동수 박사, 소설가 윤정규 선생, 이길웅 당시 부광약품 부산지사장, 방인근 목사가 가세하고 있었다. 김 목사는 당시 변호사 시보였던 노무현 대통령도 가담한 것으로 기억했다.

최성묵 목사, 차선각 선생, 김광일 변호사를 비롯해 박상도 조태원 김영일 이태성씨 등 당시 중부교회 사람들은 당국의 노출을 우려, 2선으로 참가했다.

젊은층으로는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부산에 와있던 여성그룹인 오흥숙 신선명 박재금 정동진씨, 부산 출신의 서울농대 졸업생 그룹인 설동일 소진열 차성환 송세경씨, 중부교회 대학생 스터디 그룹인 고호석 김종세 이승원 전중근 정외영 구성애씨 등이 참가했다.

이밖에 이흥만 문정현 박찬성 진영우씨, 82년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일으킨 문부식 김은숙씨도 양협에 관여했다.

부산양협은 이후 마산 광주 울산 대구 서울 수원 등지로 잇따라 퍼져나간 양협 운동의 모델이 됐으며, 87년 6월항쟁 이후 도서원 운동으로 이어졌다. 부산양협은 당시 대학내 운동가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 즈음 부산대에서는 양협을 매개로 '사랑공화국' 또는 '도깨비집'이라 불리는 사회과학 학습모임이 조직됐다. 이들 모임은 부마민주항쟁의 싹으로 자라고 있었다.



#조여드는 올가미, 그리고 해체


부산-마산을 뒤흔든 항쟁의 불길이 멎자 군경은 부산양협을 항쟁의 배후로 몰아갔다. 최성묵 김형기를 비롯한 양협의 중심 인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삼일공사로 끌려갔다.

군경은 부산양협이 부마항쟁을 주도한 증거를 찾지 못하자 10·26이 터진 뒤인 10월말 모두 방면했다. 하지만 계엄사는 이미 눈엣가시가 된 부산양협을 가만두지 않았다. 결국 그해 11월 부산양협은 해체됐다.

최근 부산양협을 집중 연구한 부산민주공원의 차성환(51)행정총무부장은 "양협은 양서를 매개로 한 소비자협동조합이자 문화공동체였고, 유통구조 개선을 이룬 구조개혁 운동의 성격도 갖고 있었다"면서 민주화 과정의 양협운동이 새롭게 평가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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