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5일 일요일

국제신문 기획시리즈-기억하라 그날의 함성〈 2 〉 항쟁의 현장, 2004년 10월 6일

기억하라 그날의 함성〈 2 〉 항쟁의 현장

"유신독재 타도" 민주 신새벽 열다

10월16일 부산대 학생들 교문 박차고 나와

남포동 진출 시위대열에 시민 수만명 가세

사흘간 격렬시위 끝내 朴정권 붕괴 불러


1979년 10월 15일. 눈이 시리도록 맑은 날씨. 금정산 기슭의 부산대 교정이 술렁거렸다. 이날 아침에 뿌려진 두 종류의 유인물 때문이었다. '민주선언문'과 '민주투쟁선언문'이란 등사된 유인물은 중간고사를 앞둔 학생들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했다.

'…우리는 언론·인권·자유의 유보나 제약에 반대한다…학우여! 얼굴을 가렸던 책을 치우고 틀어 막혔던 입과 귀를 열자…' '…독재의 논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대열을 갖고 나서자! 꺼지지 않는 자유의 횃불을 들고…'.

이진걸(당시 공대3년)과 신재식(당시 법대2년) 그룹이 각각 작성한 이 유인물들은 똑같이 '오전 10시 도서관 앞으로 모일 것'을 호소했다. 교정에는 사복경찰들이 쫙 깔려 있었다. 학생들은 모이지 않았다. 이날 시위계획은 불발로 끝났다.

#새벽벌에 울려퍼진 "독재타도!"

16일 오전 9시 30분. 전날의 실패를 반추하며 정광민(당시 상대2년) 그룹이 다시 나섰다. 유인물 등사작업으로 밤을 지샌 정광민은 인문사회관 306호 강의실로 뛰어들어가 학우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고 열변을 토했다.

"저 유신독재를 두고만 볼 것입니까. 우리 일어섭시다! 오전 10시 도서관 앞에서 모입시다!" 정광민의 열변은 마른 장작에 불을 지피는 격이었다.

오전 10시. 도서관 앞으로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인문사회관 앞에는 순식간에 100여명의 시위대가 형성됐다. "독재타도!" 구호가 터져나왔다. 변변한 반정부 데모가 없어 '유신대학'이라 조롱받고 있던 부산대가 벌떡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학생들은 스크럼을 형성해 구호를 외치며 교정을 뛰었다. 대운동장과 신정문 주변으로 4000여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유신철폐! 독재타도!". 학생들이 뿜어내는 구호는 새벽벌(부산대의 교정의 별칭)을 쩌렁쩌렁 울렸다.

투석전이 벌어지고 경찰 페퍼포그 차에서 최루탄이 쏟아졌다. 학생들은 경찰 저지선을 뚫고 3개 대열로 나뉘어 시내로 진출했다. 집결지는 남포동 극장 앞.

민심은 학생들 편이었다. 부산대~남포동을 운행하던 18, 19번 시내버스 기사와 안내양들은 학생들이 버스에 오르자 요금도 안받고 논스톱으로 남포동까지 달렸다.

#도심에 불 붙은 시민항쟁

16일 오후 2시. 남포동 부영극장 앞으로 학생들이 재집결, 도심시위의 물꼬를 트자 시민들이 시위대열에 가세했다. 200~300명씩 스크럼을 짠 시위대들은 남포동과 광복동을 오가며 "독재타도"를 외쳤다. 시위대가 국제시장에 이르자 대열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2만~3만을 헤아렸다. 거대한 시위 물결속에서 '애국가'가 뜨겁게 흘러 나왔다.

국제시장 상인들은 시위대에게 김밥 우유 달걀 박카스 등을 건네며 박수를 쳐주었다. 사통팔달 통하는 광복-남포동의 소로는 시위대에게 아주 유리했다. 경찰은 게릴라식 시위 앞에 넋을 잃고 있었다.

오후 8시. 시위대는 남포동 파출소를 습격하고 순찰차 작전차를 불태웠다. 박정희 사진도 불탔다. 성난 시민들은 이날밤에만 파출소 11개소를 부수었다.

17일 도심 데모엔 교내에서 시위를 마친 동아대생들이 가세하고, 휴교조치가 내려진 부산대생, 분노한 시민들이 합세해 시위규모가 한층 커졌다. 수십갈래의 시위대는 중구 서구 동구 지역의 공공기관, 파출소 그리고 언론사 등을 공격했다.

이날 오후 4~5시, 중부경찰서 상황일지에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시위동향이 잘 나타나 있다. △16:00 용두산공원 청소년 4명 서성대고 있음 △16:05 제1대청파출소 300명, 부산우체국 앞 100명 데모. 애국가 부름 △16:20 중앙동사무소 쪽으로 데모대 진행. 500명 부산우체국 쪽으로 행진 △16:35 옛 남포극장 앞 300명 집결 △16:50 동아아케이드 앞 200명 모여 '유신철폐'구호 시위.

박정희 정권은 급기야 부산지역에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시위대는 이날 밤 계엄군이 지키는 시청앞까지 몰려가 "독재타도"를 외쳤다. 완전무장한 공수대원들은 최루탄과 몽둥이로 시위를 진압했다. 밤 늦게 비가 내렸다. 연 사흘간의 부산항쟁은 이렇게 끝나고 있었다.

#그때 그 자리의 오늘

2004년 10월의 부산대 중앙도서관 앞뜰. 25년전 함성이 터졌던 자리에는 부마민중항쟁탑이 세워져 있다. '…시월이 오면/핏발선 가슴마다/살아오는 십일육/동지여 전진하자/깨치고 나가자…'

격정이 식었음인가. 항쟁탑은 그저그런 기념탑일 뿐, 학생들의 관심은 딴데 가 있는 듯했다. '부마항쟁을 아느냐'고 묻자 윤모(21·부산대 공대 2년)씨는 "6월 항쟁을 말하느냐"고 되물어왔다. 학생들의 관심은 오로지 취업이었다.

부산대 총학생회장 전위봉(23 산업공학과4)씨는 "부마항쟁을 기억하는 학우들이 많진 않지만, 총학은 해마다 10월제를 통해 선배들의 자랑스런 항쟁정신을 이어가려 하고 있다"면서 "올해는 국가보안법 폐지에 힘을 모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중의 울분이 폭발했던 광복·남포동에는 오늘, 삶의 아우성이 가득하다. 조여드는 경제난은 시민들의 얼굴에서 웃음을 빼앗아 갔다. 하지만 당시 항쟁을 지켜봤던 시장 상인들은 '그날의 난리'를 제법 생생히 기억했다.

국제시장 상인 최한길(50·당시 양말가게 운영)씨는 "그때 우린 학생 편이었어. 좌판 아지매들이 빈대떡과 막걸리를 주기도 했지. 계엄군들이 학생들을 개 패듯이 패는 걸 많이 봤어. 매스컴에는 보도가 안됐지"라고 회고했다.

도심 시위에 참여했다는 조봉제(51·국제시장 피혁제품 도매)씨는 "당시 대부분의 젊은 친구들은 사회가 잘못돼 간다는 것을 알았다. 의분도 있었다. 대청로 육교를 사이에 두고 전경과 대치하면서 불붙은 연탄을 구해 전경쪽으로 집어던졌는데, 버스타고 가던 시민들이 박수를 쳤다"고 기억했다.

25년전 항쟁을 반추하는 시민들의 얼굴에는 알지못할 흥분과 아쉬움이 묘하게 교차하고 있었다.

분노한 시위대에 의해 3차례나 공격을 당해 크게 파손된 남포파출소(현 남포지구대)는 보수를 해서 사용해오다 지난 87년 토치카 형태의 3층 벽돌건물로 바뀌어 오늘의 남포동을 지키고 있다. 

출처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41007.22005213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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