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붕괴 이후, 대전환은 가능한가
긴급좌담회, 2020년 4월 2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회의실
유강문(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원장, 사회)
신영전(한양대 교수, 예방의학)
서복경(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 정치학)
신진욱(중앙대 교수, 사회학)
전병유(한신대 교수, 노동경제학)
신진욱(중앙대 교수, 사회학)
(세계화 이후) 작금의 이 위기가 가져올 파장이 어느 수준일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그동안 세계화는 활발한 이동, 접촉, 융합으로 특징되는데, 바이러스로 인해 경계와 차단, 통제와 규제가 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감염병의 위기를 넘긴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 기존과 다른 형태의 세계화, 즉 물리적 요인 대신, 디지털화, 정보사회, 4차산업혁명 등이 사회 구석구석으로 확산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공공영역 강화, 사회적 안전) 개인이 아무리 합리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하더라도 감염병 예방이 불가능한 현재와 같은 상황이야말로 공공영역을 대폭 강화할 수 있는 기회다. 보편적 연대가 나와 내 가족을 살린다는 걸 집단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사회적 안전이라는 관점이 중요하다. 가장 기본적인 안전을 보편적으로 지원하고 그 기초 위에서 더 위험한 집단을 특정해서 지원하는 다층적 방식이다. 평상의 시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려도 어렵지만 지금은 좀 더 과감한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해봐야 할 상황이다.
서복경(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 정치학)
(대붕괴의 진행, 국제질서의 불확실성 극대화) 직감적으로는 총체적 붕괴 상태다. 세계 정치경제질서 측면에서 볼 때 지금의 체제는 자유무역과 집단안보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져왔는데 이게 깨지고 있다. 자유무역은 자유로운 이동, 특히 사람의 이동을 전제로 하는데, 지금은 이동이 생명에 위협을 주는 상황으로 변했다. 집단안보는 패권국이 역할을 해줘야 기능하는데, 미국과 유럽이 각자 도생하고 있고 독일이 유럽연합을 주도하지도 못했다. 이렇게 되면 국제질서의 불확실성이 극대화될 가능성이 크다. 유엔(UN), 세계보건기구(WHO)도 이번 상황에서 거의 무능했다. 얼마전 개최된 주요 20개국(G20)회의에서 참여한 정상들이 이 사태에 대해 아무런 기준도 대책도 내놓지 못했다. 글로벌 거버넌스 체제 자체가 무너진 상태다. 대전환은 아직 안 일어났지만 대붕괴는 진행되는 듯하다.
(식량주권, 식량민족주의) 4-5월이 되면 식량 대란이 올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식량 주권, 식량 민족주의가 대두될 가능성이 있다. 우리나라의 식량 자급률이 낮기 때문에 물류 이동이 차단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1차 산업 중심의 자원민족주의로 갈 가능성이 있다. 이번에는 위기가 잡힌다고 하더라도 앞으로도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각 나라들이 식량과 자원을 아끼려 할거다
(새로운 노동규범 필요) 공공정책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다. 또 새로운 노동규범을 만들어가야 할 때이기도 하다. 그동안 우리는 법에는 아프면 일하러 가지 않아도 된다고 되어 있었지만 실재로는 아파도 일하러 가야 했다. 지금은 ‘아프면 일하러 가면 안 된다. 일하러 가면 큰일 난다’고 말하고 있다. 견고했던 노동윤리 개념에 지진이 난 것이다. 양육, 돈벌이 등을 포함해 사람들의 윤리규범이나 인식도 변화할 수 있다.
전병유(한신대 교수, 노동경제학)
(균형 전략) 위기가 오면 공포지수가 올라가는데 경제학자들은 좀 냉정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이번은 과거와 다를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조심스럽게 말씀드리면 코로나가 몇 년마다 반복될 가능성이 있고 지속적인 경제위기로 갈 가능성이 있다. 코로나19가 소득수준이 높고 글로벌화가 많이 진행된 나라를 중심으로 발생하고 있어 개방경제인 한국에는 큰 타격이다. 기존 위기와는 좀 다른 것이, 과거에는 경제 내부에서 기인한 위기였다면 이번에는 전적으로 외부에서 발생한 위기, 외생적 위기다. 기존과 성격도 다르고 전개되는 방향도 다른, 경험하지 못한 위기다. 감염병에 대한 통제와 경제가 상충할 가능성이 있다. 감염을 통제하다 보면 경제가 나빠지고 경제가 좋아지면 감염이 다시 올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양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균형의 문제이다. 다만, 우리나라가 감염병 통제에는 성공했지만 정상상태로 가는 것에 대한 전략이 없어 아직 불확실성이 크다. 당장은 서비스업 부문과 취약계층에게 큰 타격이 오고 있고, 중장기적으로는 수요 부족에 따른 장기 침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공공성 확대의 계기, 새로운 주체) 위기 이후에는 적자생존으로 양극화가 심해지는 경향이 있다. 이번 위기야말로 공공성 확대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취약계층의 사회안전망에 대해 20년간 이야기 했는데 해결된 것이 거의 없다. 그런데 누가 할 것인가가 문제다. 시민사회도 위태롭고, 학계도 기대하기 어렵다. 정치권, 관료집단 등에서 돌파구가 생길 것 같지도 않다. 새로운 실험을 위한 혁신, 기획이 많이 필요하다. 공공성을 높이는 게 꼭 유럽의 복지국가 모델로 가자는 건 아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 주체가 절실하다.
신영전(한양대 교수, 예방의학)
(과학의 시민적 통제와 생태학적 통제, 시민사회와 인간의 역할) 얼마전 박노자 선생이 칼럼에서 이번 코로나19사태로 ‘미국, 시장, 선진국이라는 신화’가 깨지고 있다고 쓰셨다. 그런데 꼭 깨져야 할 ‘과학의 신화’는 여전히 견고하다. 현재의 감염병 대유행은 과학과 대자본의 영리적 결합에 따른 생태파괴애서 비롯된 것인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과학이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치료약과 백신만 나오면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시민사회와 인간의 역할은 점점 위축되어 가고 있다. 과학 부문에서 시민적 통제, 생태학적 통제 가능성을 키우지 않는다면 아주 비관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또한 그동안 사스 백신이 개발되지 않았던 건 기술적으로 어려워서라기 보다는 바이러스의 잦은 변종화로 인해 영리를 추구하는 자본이 이윤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측면이 크다. 과학과 자본의 영리적 결합을 그대로 나둔 채 효과적인 감염병의 유행과 대응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는 매우 정치적인 문제다.
(공생적 온존) 지그문트 바우만이 <새로운 빈곤>에서 인용한 것처럼 “집단적 궁핍화에 대해 유일하게 긍정적인 대안은 ’집단적인 자발적 소박함’이다. 이와 함께 ‘공생적 온존’(symbiotic wellbeing), 즉 생태학적 경계를 인간중심에서 생태까지 확장하는 것이 답이라고 본다. 대형 참사와 재난은 일국적 대응으로 끝날 수 없다. 올바른 규범과 정치적 리더십을 가진 민주적 세계정부, 일국적 체제를 넘는 지도체제 구축 또한 핵심적 요소라고 생각한다.
(공공의료 강화) 제일 나쁘고 위험한 시나리오는 공공병원 확대 대신 민간병원의 공공성을 확대하자는 논리로 가는 것이다. 현재 민간병원의 절반 정도가 비영리 법인이다. 공적 운영을 전제로 법인세를 제외한 아홉 종류의 세금이 면제된다. 그런데 이 재난 상황에서 이른바 ‘빅5’라 불리는 대형병원들은 어떤 공적 역할을 했나? 만약 민간 병원의 공공성을 강화하려 한다면 지금과 같은 위기시에 공공적 목적을 위해 병실의 상당부분을 비울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공공 보건의료 부문을 양적, 질적으로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 이유다.
(역동적 민주주의, 시민사회의 역할) 지난 3월 31일에 385개 시민, 노동, 종교단체가 코로나 대응을 위해 모였다. 이게 중요한 이유가 이 위기는 정부 재정과 행정력만으로 감당할 수 없고, 자칫 독단으로 빠질 수 있으며, 비제도권 하의 약자들이 배제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시민사회 연대체를 구성해 정부를 지지할 건 지지하고 견제할 것은 견제해야 한다. 이렇게 우리 사회의 강점인 ‘역동적 민주주의’가 기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시민사회가 상황실을 두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호소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고 직접 모니터링도 하는 시스템이 우선적으로 가동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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