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4일 화요일

기후 위기, '위기라고 못 느끼는 것'이 더 큰 위기/ 조천호 경희사이버대학교 기후변화특임교수

- 한국에서는 환경문제 하면 단연 '미세 먼지'를 꼽는다. 미세 먼지에 비한다면 기후 위기 문제는 얼마나 심각한 건가.
 
미세 먼지는 일상의 문제다. 불편하지만 일상을 유지할 수 있다. 심해도 시간이 지나면 회복된다. 오래가면 5일이다. 햇빛과 반응하면 파괴된다. 이것은 우리가 멋진 옷을 입기 위해 공장을 돌리고, 좋은 곳을 가기 위해 차를 타는 과정에서 발생한 거다. 우리 이익과 편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우리 세대 문제다.
 
그리고 코로나19가 들어왔다. 많은 사람이 아프고, 죽는 사람이 생겨나고, 세계적으로 경제가 불안정해지고 위축됐다. 그런데도 과거 전염병 역사를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바이러스는 사그라든다. 또 다른 감염병이 생길지 모르지만, 회복할 것이다. 마치 태풍이 쓸고 지나가도 며칠 지나면 사회가 정상으로 회복되는 것과 같다. 미세 먼지나 코로나19 모두 '회복력'이 있는 것이다.
 
기후 위기는 급이 다르다. 온실가스가 배출되면, 그 안에 있는 이산화탄소는 수백 년간 공기 중에 남아 있다. 끊임없이 누적되고 강도가 세진다. 지역적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 문제를 일으킨다. 결국, 지구 조절 시스템이 붕괴한다. 지구 온도가 높아지면 폭염이 발생하는 정도가 아니라 극단적 날씨 변화가 초래된다. 해양이 산성화하고, 해수면이 높아지고, 물과 식량이 부족해지고, 생물 다양성이 파괴될 것이다. 우리 삶과 관련한 모든 기반과 체계가 붕괴할 것이다.
 
지난 100년간 지구 온도가 1도 상승했다. 이는 감지할 수 있는 위험이었다. 우리가 항시 기후 위기를 느끼고 사는 건 아니다. 폭염이나 산불이 날 때마다 감지한다. 여기서 0.5도 더 올라가면 전 세계적으로 여러 가지 일이 발생하면서 그 위험이 본격적으로 눈에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지금 추세라면 그 시기는 2040년이 될 것이다.
 
파리 기후 협약에서는 지구 온도 상승 폭을 2도 이내로 억제해야 한다고 했는데, 2도를 돌파하면 지구가 자기 증폭적으로 생명을 말살할 것이다. 지난 5억 년간 대멸종 사건이 5번 있었다. 우리가 코로나19를 겪으며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는데, 기후 위기는 그런 수준이 아니다. "구리거울로 보듯 흐릿한 게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마주해 볼 것이다"는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처럼, 명백하게 다가올 것이다.
 
- 러시아 밀 흉년으로 시리아 밀가루 가격이 폭등하고 난민 사태까지 초래되었다는 사례를 책과 강연에서 여러 번 언급했다. 기후 위기가 촉발한 문제가 결국 사회 불평등까지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기후 위기는 전 세계에 동시적으로 오지 않는다. 약한 부분부터 무너진다.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나라는 괜찮은데, 생뚱맞은 투발루나 방글라데시에는 물이 차고 있다. 온실가스 배출과 상관없는 나라들이다.
 
가뭄은 지역적 현상에서 끝나지 않는다. 지금보다 0.5도가 올라가면 3600만 명이 배고픔에 시달리게 된다. 지구 온도 상승 폭이 2도를 넘기면 36000만 명이 굶주릴 것이다. 사람들은 배가 고프면 국경을 넘는다. 국제사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기후 문제는 정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100만 원 버는 사람이 10만 원 피해를 보고, 1000만 원 버는 사람은 100만 원 피해를 보는 게 아니다. 1000만 원 버는 사람은 손해가 없고, 100만 원 버는 사람만 70~80만 원 손해를 보게 된다.
 
아끼고 나누면 극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정의롭지 않은 사회라면 어떻게 될까. 지금도 전 세계 음식물의 1/3이 그냥 버려지는데. 시리아 사태 당시 밀가루값이 60~70% 올라갔다. 국제사회 투기 자본이 곡물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밀값이 올라가면 가장 약한 사람들, 수입 대부분을 식량 구매에 쓰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나. 말 그대로 경기를 일으킨다. 위기는 그런 식으로 온다. '물이 부족하다', '날씨가 안 좋다' 수준이 아니다.
 
성서는 끊임없이 정의와 공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 온실가스는 누적성을 갖는다. 다음 세대에 위험한 것이다. 우리야 자동차 돌리고 공장도 돌리고 살지만, 후세대는 온실가스 배출도 못 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온실가스로 끼친 피해를 처리해야 한다. 원인 제공자가 즐기고 끝나면 뒤처리해야 하는 세대가 다르다. 세대 간 정의 문제 역시 걸려 있다.
 
- 이번 총선에서 보수 정당은 대부분 핵발전 산업을 원상회복하겠다고 공약했다. 기독자유통일당은 "600조 원 손실을 주는 탈원전 정책이 아닌 고부가가치 원전 사업 활성화"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서구는 재생에너지 발전 비율이 50%에 육박한다. 지난 10년간 이미 선진국은 산업 기술 혁신을 통해 태양광 패널과 배터리 가격을 85%까지, 풍력발전 설비 비용은 50%까지 떨어뜨렸다. 석탄이나 원자력은 그렇지 않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원자력은 안전기준 강화 때문에 비용이 2배 정도 상승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보수 진영은 핵에 매달린다. 재생에너지 설비를 설치할 땅이 없다거나 태양광발전을 하기에는 햇빛이 약하다는 소리를 한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는 남유럽과 위도가 같다. (태양광발전이 최대 에너지원인) 독일은 위도가 신의주와 비슷하다. 또 태양광이 환경을 파괴한다는 등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어떤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먹힌다.
 
기후 위기보다도 '위기를 위기로 못 느끼는 것'이 더 큰 위기다. 소돔과 고모라도 몇 명 제외하고는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다가 불벼락 맞은 것 아닌가.
 
- 텀블러를 쓰고, 일회용품 사용은 자제하려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 이런 노력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건가.
 
개인이 텀블러 쓰고, 자원 아끼고, 대중교통 이용하려는 것은 중요한 자세다. 감수성에서부터 출발하는 거니까. 그러나 오늘날 위기는 그것만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물질의 신을 섬기고 있는 체계의 문제다. '성장 성장' 외치는 이 우상을 부숴야 한다.
 
기후 위기에 대한 대응은 정치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미국과 유럽은 국가와 도시 단위에서 많이 노력한다. 산업을 전환하고 기술혁신도 어마어마하게 한다. 뉴욕은 2050년까지 화석연료 배출 안 하는 도시를 만들겠다는 OneNYC 2050 정책을 내놓고 기후활성화법도 제정했다. 앞으로 짓는 건물은 가능한 한 에너지 효율을 공학적으로 최대치로 끌어올려야 하고, 이미 있는 건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건물주는 갑자기 비용이 발생하니까 막기 위해 로비를 한다. 임대료를 높일 수밖에 없고, 임대료가 높아지면 사업자가 줄어들어 경제가 붕괴할 것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뉴욕시민들은 소수 부동산 업자 이익을 반영하는 사람을 대표로 뽑지 않았다. 그러니 법안이 통과될 수 있었다. 우리도 그런 공무원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텀블러 백날 쓴다 한들 이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다.
 
프랑스 파리시장은 시내 주차장을 6만 개 없애겠다고 공약했다. 유럽 좋은 도시들은 걷거나 자전거 탈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벌써 생활 리듬을 바꾸는 것이다. 자전거는 전용 도로가 있으면 한 시간에 10km를 가고, 도로가 잘되어 있으면 20km도 간다.
 
그 정도면 서울 안에서도 자전거 생활이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도시 못 만든다. 그렇게 하면 망할 거 같으니까. 바꾸려면 법이 통과되어야 한다. 법을 만들어야 세상을 조금씩 바꿔 나갈 수 있다. 사회적으로 좋은 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물질의 신을 붕괴시킬 수 있는 선출직을 뽑아야 한다.
 
- 교회 떠난 지 10년이라고 했는데, 신앙 여정을 간략히 설명해 준다면.
 
어린 시절부터 집 앞에 있는 교회를 다녔다. 열심히 신앙생활한 건 대입 이후부터다. 교회 안에서 선후배, 동료들과 같이 성경을 공부하는 게 즐거웠다. 그때 많이 배웠다. 신앙생활한다고 해서 보통 말하는 정상적인 교인의 모습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젊은 시절에 왜 그랬을까 싶다. 낮에는 데모하면서 짱돌 몇 번 던지다가, 저녁에는 나이트클럽 가서 신나게 놀다가정처 없이 살았다.
 
그러면서도 해방신학·민중신학 책 가져다 놓고 읽었다. 그렇다고 해방신학의 전사 같은 건 아니었고.(웃음) 1980년대 대학생들이 다 보길래 우리도 보자 하고 읽었다. 그러다가 나이트 가고 그랬다.(웃음) 몇 권 읽은 거다. 지금까지 기억나는 건 별로 없는데, 기존 교회에서 배운 것과 전혀 다른 틀이어서 인상 깊었다.
 
가톨릭 출판사에서 나온 책 한 권이 기억에 남는다. 금서였다. 니카라과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그 구절이 어떻게 와닿았는지 나누는 책이었다. 같은 구절을 읽고도 오늘날 보수 교회에서 말하듯이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당시 니카라과가 혁명기였기 때문에 예수의 모습을 혁명군으로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서로 다르게 이야기하면서도, 내가 맞다거나 네가 문제라거나 하는 식이 아니었다. 각자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인 후 신부가 다양함을 묶는 기도로 끝낸다. 서로의 다름이 인정되고 열려 있는 모습의 공동체가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0대 중후반, 교회를 떠나 뜻이 맞는 이들과 교회를 만들어 보자 해서 실행해 보기도 했다. 꿈꿨던 대로 흘러가지는 않더라.
 
- 조천호 교수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가 이 세상과 사람을 봤던 시각, 그것이 나에게는 하나의 도전이었다. 우리는 권력, 돈 많은 사람, 출신 학교 같은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 권력 가진 사람이 도덕이고 기준이라고 얘기한다. 그게 나름대로 우리 사회에 구축된 하나의 시스템이기도 하다.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바리새인이 길거리에 나와서 "나는 십일조 다 내고, 율법과 모든 법을 잘 지킨다"고 자랑스럽게 기도하지 않았나. 반면 과부는 바리새인에 비해 굉장히 조금밖에 내지 않았지만, 자기의 모든 것을 내놓았다. 예수는 구원과 하늘나라가 그런 사람들에게 있다고 말했다. 그 메시지는 지금까지도 나에게 굉장히 강력하게 다가온다.
 
나 역시 세상을 그렇게 잘 보지 못한다. 그래도 예수가 그렇게 보라고 했던 말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지금도 머릿속이 복잡할 때 복음서를 읽으면서 예수님 말씀에서 기준을 찾으려고 애쓴다. 나의 이성을 통해서는 자꾸 뱅뱅 도는데, 예수의 말씀에는 힘이랄까, 파토스랄까 확 다가오는 게 있다. 교회 다닐 때처럼 아침마다 묵상하거나 이러지는 않는데, 가끔 복잡하고 생각이 뱅뱅 돌 때면 복음서를 다시 읽어 본다.
 
- 과학을 공부한 입장에서 성경의 창조 이야기가 과학적 사실과 상충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나.
 
전혀. 성경책이 과학책은 아니지 않나. 우리가 소설을 읽을 때 과학책처럼 읽지도 않고성경은 성경이다. 오히려 창조론자들이 과학으로 설명하려고 달려드는 게 문제다. 과학은 절대적 진리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세상이 돌아가는 어떤 사실 자체를 이해하는 방법과 과정이라고 본다. 그러니 증거가 있어야 하고, 합리적 논리가 만들어지면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한다. 과학에서 100%란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의 모든 지식과 체계는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
 
- 과거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성경 구절이 세상을 마음대로 다스리거나 개발해도 된다는 논리의 준거로 쓰였다.
 
나는 오히려 기후 위기 시대에 맞는 성서 해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지구 위기, 기후 위기라는 건 우리가 쌓는 쓰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음식물의 1/3(소비되지 못한 채) 쓰레기가 된다. 이러한 세상에 살면서 경기가 침체되느니 성장이 안 되느니권력과 언론이 세뇌하는 세상에서 살아간다. 음식물 쓰레기가 쌓이는 것이 결핍 때문인가? 욕망의 과잉 때문이다.
 
세상은 성장시켜야 한다고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주식 안 하는 사람도 주가 떨어지면 불안해서 못 산다. 전 국민이 불안해한다. 어떤 면에서 이거야말로 성서가 부숴 버리라고 그렇게 강조하는 '우상'이다. 필요의 결핍이 아니라 욕망의 과잉, 성서가 얘기하는 맘몬을 부수라는 메시지가 정확히 작동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보고 있다.
 
- 기후 위기 문제에 교회는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가.
 
우리 삶을 생각해 보라. 정말 열심히 살아간다. 학교 다닐 때부터 경쟁 사회에 들어가고, 동료와 친구와 연대하라고 배우지 않고 우월한 사람이 되고 박수를 받는 사람이 되라고 교육받으면서 살아간다. 사회에 나가도 그렇게 해야 생존한다고 바쁘게 살았다. 그 이유가 뭔가.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 좋은 대학에 못 가면 불안해서. 매우 나쁘고 안 좋은 사회다.
 
서로를 돌보고 연대하기 위해 함께 사는 거지, 남을 이기고 짓밟으라고 공동체 생활하는 것 아니다. 그런 점에서 기후 위기는 우리가 제대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닥친 문제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기독교에서는 자기가 먼저 죄인이라고 선언해야 구원받는다고 하지 않나. 좋은 대학 가고 축복받고 승진하고이따위 세상을 만들어 놓고서는 교회조차도 똑같은 소리 하고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 되겠다는 소리 아닌가. 더 갖고, 가진 걸 더 강화하려는 것? 성경 어디를 봐도 그거 때려 부수라고 했다.
 
소돔과 고모라가 의인 10명을 못 구해서 불에 탔다는 점을 기억하면 좋겠다. 의인 10명만 있으면 구할 수 있었다. 그 메시지를 기억해야 할 때가 아닌가. 오늘날의 문제가 욕망의 과잉, 물질의 신을 섬기는 문제로 일어나는 건데, 교회가 의인을 키워 낼 수 있다면 이 세상은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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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호 경희사이버대학교 기후변화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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