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러 지면에서 우리가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세계를 급진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썼다. 나의 전망은 알랭 바디우와 한병철과 같은 철학자들을 포함해 좌파와 우파 모두로부터 큰 비판을 받았다. 그들은 지금 사태가 내가 주장한 것처럼 자본주의에 치명적인 타격이 되기는커녕 더 강력한 모습의 자본주의로 이어질 것이라고 반박한다. 또 이번 위기로 우리가 국가의 통제에 저항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의 통제에 더 강하게 순응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의하면, 코로나로 인한 공황 상태는 타자를 연대해야 할 동지로 보게 하는 대신 거리를 두어야 하는 치명적인 위협으로 보게 할 뿐이다. 요컨대 현재 상황은 철저히 ‘비정치적' 국면이라는 것이다.
정말 그들의 주장대로 우리는 지금 생존만이 중요한 비정치적 국면을 맞고 있는 것일까? 나는 오히려 철학자 카트린 말라부의 통찰처럼 현 상황을 ‘에포케' 상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에포케란 관습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괄호 속에 집어넣고, 단정적인 판단을 멈추는 일시정지의 상태다. 우리는 현재의 위기 속에서 이 사회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사고해야 한다.
그런 일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이를테면 철도 국유화 주장을 강력하게 비판해오던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지난 3월 코로나 사태 극복을 이유로 영국 철도의 일시적 국유화를 발표한 것이 그 예다. 이전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줄리언 어산지의 평가대로 “코로나 위기는 지금 우리에게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보여준다”. 그 가능성의 방향은 최고의 쪽이 될 수도, 최악의 쪽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이 사회를 어느 쪽으로 돌릴지 선택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중대한 ‘정치적' 국면과 직면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사람들의 안전보다는 시장의 안전에 더 큰 신경을 쓰고 있다. 댄 패트릭 텍사스 부지사는 경제를 위해 미국인들은 일터에 돌아가야 하며, 코로나에 취약한 노인들은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보수 언론인들 역시 각종 폐쇄 조치를 서둘러 해제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들은 사람들의 생명과 자본주의의 생명 사이를 저울질한 뒤, 자본주의를 구하는 쪽을 택한다.
하지만 우리는 칸트가 말한 ‘이성의 공적 사용'을 실천해야 한다. “이성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공적으로 생각하라.” 코로나가 사그라든다고 하더라도 생태학적 위협과 결합한 또 다른 위기가 닥칠 것은 분명하고, 이런 위기는 계속될 것이다.
내가 말하는 급진적 변화는 허황한 백일몽이 아니다. 이미 그런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벌써 전세계 많은 국가가 적극적으로 더 큰 정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마스크의 생산과 배급을 통제하는가 하면, 경제적 어려움에 빠진 국민들에게 직접 현금을 지원하기도 한다. 과거라면 생각하기 어려웠을 이런 일들은 모두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조치들이다. 경제 활동이 어렵게 된 수많은 이들의 삶을 그저 시장에 맡겨둘 수 없음이 이제 명백해진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다음 두가지를 이루어야 한다. 취약한 이들에 대한 돌봄과 관련하여서는 ‘로컬' 공동체들의 도움을 활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제도적 의료 체계를 다듬을 필요가 있다. 반면, 자원의 생산과 공유와 관련해서는 효과적인 ‘국제적' 공조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한 국가의 개별적 노력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런 급진적 변화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야만'의 상태로 추락하게 된다.
내 주장을 비판하는 이들이 놓치는 것이 있다. 생존에 대한 집착은 그저 “변화는 잊어버리자. 안전한 길을 택함으로써 살아남고 보자”와 같은 태도가 아니다. 세계를 자멸 속에서 구하려는 필사적인 노력 속에서만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치명적인 위협을 통해서만 우리는 비로소 하나 된 인류의 모습을 상상하고 꿈꿀 수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러한 기회다. 번역 김박수연
원문보기:
급진적 변화냐, 야만이냐 / 슬라보이 지제크(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3670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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