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간 ‘지도자 없는 사회운동’의 투쟁 순환이 전 지구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운동들이 권위적인 지도자를 실각시키거나, 진보적인 정책을 도입하거나, 억압적인 국가권력을 저지하는 등 인상적인 결과를 가져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2010년대 들어서 전 지구적으로 이어진 투쟁에는 어떠한 흐름이 있었다. ‘아랍의 봄’으로 부터 시작해 스페인, 그리스, 그리고 ‘월가 점령’으로 뻗어나가더니 전 세계의 여러 나라들을 돌아 홍콩의 ‘우산혁명’과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 ‘블랙라이브스매터’가 출현했다. 2016~2017년 박근혜 정부에 맞선 한국의 ‘촛불집회’ 역시 무관하지 않다. 이른바 ‘지도자 없는 사회운동’이다.
오늘날 가장 주목받는 좌파 사상가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새 책 <어셈블리>(2017)가 새로 나왔다. 부제는 ‘21세기 새로운 민주주의 질서에 대한 제언’. <제국>(2000), <다중>(2004), <공통체>(2009)와 소책자로 발표한 <선언>(2012)의 논의를 새로운 현실에 맞게 진전시켰다.
네그리와 그의 제자인 하트는 <제국>에서 세계화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정치 질서인 ‘제국’의 개념을 환기했다. 이들은 유엔(UN), 국제통화기금(IMF), 세계무역기구(WTO) 등 국제기구와 다국적 기업들이 형성하는 세계를 제국으로 불렀다. 정치·경제·군사 네트워크인 이들 절대 권력의 전 세계적 행위를 분석한 <제국>은 21세기 정치·경제·산업질서를 읽는 새로운 정치경제학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중>은 제국의 시대에 새로운 정치 주체인 ‘다중(multitude)’을 규정했다. 인민(people)이나 대중(masse)과 구별되는 다중은 제국의 지배를 끝내고 새로운 삶, 민주적 세상을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들이다. <공통체>에선 공기와 물, 토지 등 물질세계의 공통적인 부를 비롯해 사회 관계까지 포괄하는 ‘공통적인 것(the common)’을 제시한다. 네그리와 하트는 최근의 사회적 투쟁이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로부터 ‘공통적인 것’을 지켜내려는 열망이 자리잡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오늘날 세계의 대안과 그것을 현실화할 정치적 주체의 창출로서 ‘다중의 군주 되기’를 얘기한다.
최신작 <어셈블리>는 최근 전 지구적으로 이어진 중앙집중적 리더가 없는 사회운동들이 아직까지는 오래 지속되는 대안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이제는 지도자와 다중의 역할의 전도가 필요하고, 나아가 그것을 장기적 안목에서 제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어셈블리> 한국어판 출간에 맞춰 경향신문과 e메일 인터뷰를 진행했다. 13일 두 사람은 “우리는 한국의 사회투쟁들이 보인 끈기와 독창성에 오랫동안 감탄하며 바라봤다”면서 “한국의 투쟁들이 다가올 시기에 어떻게 발전할지, 그리고 이 투쟁들이 우리가 공유하는 미래를 위해 어떤 새로운 교훈을 가르쳐줄지 배우고자 한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책을 한국어로 옮긴 이승준·정유진 연구자의 도움을 받았다. 아래는 인터뷰 전체 질문과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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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한국에선 ‘촛불 집회’라 불리는 투쟁이 2008년과 2016년 대규모로 있었습니다. 전자는 구체적 성과를 얻는데 실패했지만, 후자는 당시 권력자였던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변혁의 힘을 제도화하는 과제에 직면했습니다. <어셈블리>에서 주목하는 문제 의식과도 닿아있는 변화인 것 같습니다. <어셈블리>의 집필 계기와 함께 영감을 준 사건들이 있다면 설명 부탁드립니다.
=(네그리·하트)우리는 민주주의와 평등을 열망하고, 새로운 삶 형태를 실험하며, 금융의 통치와 자본주의 질서의 지배에 복종하길 거부하는 전 세계 곳곳의 투쟁들에게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상이한 방식으로 발전했고, 성공의 정도가 조금씩 달랐던 국제적 투쟁 순환이 확장되는 것을 지켜보며 연구했죠. 미국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점거 운동, 아랍의 봄, 스페인의 인디그나도스*, 라틴아메리카의 다양한 진보 정부들 그리고 미국의 블랙라이브스매터, 니우나메노스**와 같은 다양한 페미니즘 운동들입니다. 우리는 한국의 촛불집회가 이러한 투쟁 연쇄사슬을 확장시키는 하나의 고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운동들에 영감을 받긴 했지만, 또한 운동들이 자신들이 가진 야망을 실현할 수 없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우리가 <어셈블리>를 쓰게 된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우리는 어떤 운동도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운동이 패배했다는 사실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운동의 의미를 퇴색시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러 활동가들이 탐구하고 있는 바로 그 질문을 제기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즉 ‘어떻게 이 운동들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가?’ ‘어떻게 이 운동들은 오래 지속하는 대규모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민주적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가?’를 말이죠.
*‘인디그나도스(분노한 사람들)’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2011)라는 책의 이름에서 영감을 얻어 정부의 긴축정책 반대, 실업문제 해결, 빈부격차 해소, 부패 일소, 기성 정당의 정치적 기득권 해소 등을 요구했다.
**‘더 이상 아무도 안 된다’는 의미의 니우나메노스(NiUnaMenos)는 2015년 이후로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일어난 시위 및 캠페인을 말한다. 공식 홈페이지에는 자신들을 ‘마초 남성 폭력에 맞서는 집단적 비명’으로 소개한다. 운동은 주로 여성 학살(femicide)에 항의하는 것이지만, 성역할, 성희롱, 성별 임금격차, 성적 대상화, 낙태합법화, 성노동자의 권리, 트랜스젠더의 권리 등 폭넓은 주제를 다룬다.
-이전 책들과 달리 <어셈블리>는 한국어판에서도 영어 제목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책의 번역자는 ‘어셈블리(Assembly)’라는 단어가 한국어에서 집회, 의회 등 중첩적 의미를 가지고 있어 옮기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한국어에서 ‘모으기’(리더십을 필요로 하는), ‘모이기’(집단적 행위로 나타나는), ‘의사결정’(제도화로 이어지는)의 의미가 중첩된 말로 <어셈블리>를 그대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저자께서 의도하신 ‘어셈블리’는 어떠한 의미일까요? 향후 사람들을 어떻게 모을 것인지, 아니면 현재 모여있는 사람들이 주요 주제인 것일까요? 어셈블리의 여러 의미 중에 어느 쪽에 방점을 두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우리에게도 ‘어셈블리’라는 말은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는 그에 대한 여러 의미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 어셈블리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함께-있음의 힘’, 사회적 협동의 힘, 우리가 함께 투쟁할 때 가지는 힘을 지시합니다. 하지만 그 밖의 다른 의미들도 우리에게는 중요합니다. 여러 사회운동에서 실험적인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를 형성했던 ‘총회’(general assemblies)는 어셈블리의 중요한 발전 형태입니다. 전통적으로 영어에선 ‘어셈블리의 권리’(집회의 권리)는 노동 조직과 노조활동의 법적 토대였습니다. 그리고 어셈블리는 정부 구조로서의 의회를 지시하기도 합니다. 종교적 전통에서의 어셈블리, 회중이나 친교모임도 어셈블리의 유용한 의미입니다. 우리는 보다 더 특수한 의미를 가지는 들뢰즈·가타리의 아상블라주(assemblage·배치) 개념이나 더 자세히는 ‘기계적 배치’ 개념을 덧붙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셈블리를 함께 작동하는 의미들의 네트워크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현재 그리고 최근에 인식한 어셈블리의 의미는 미래의 어셈블리들이 획득할 힘에 대한 첫 번째 지시어에 불과한 것일 수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 ‘지도자 없는 사회운동’의 투쟁 순환이 전 지구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책에선 “운동에게 전략을, 리더십에게 전술을”이라고 전략과 전술의 전도를 제안합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이러한 운동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미심쩍음이 남을 것 같습니다. 한국에선 ‘촛불 집회’로 기존 권력을 무너뜨렸고, 새로 집권한 세력 역시 ‘촛불의 힘’으로 당선됐음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의 성과를 국가 권력으로 제도화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처음 운동을 발생시킨 다중의 요구와도 멀어져간다는 비판도 있고, 참여자들 사이에서도 입장이 나뉘게 됐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셈블리>가 어떠한 기여를 할 수 있고,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확히 우리가 이 책을 시작할 때 던진 의문과 문제입니다. 이는 한국의 운동만이 겪는 독특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최근 전 세계에서 일어난 운동들이 마주하는 딜레마입니다. 다음과 같이 분명한 몇 가지 사실을 인정하는 일에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첫째, 우리는 이른바 ‘리더 없는 운동들’에서 일어난 민주주의와 평등에의 요구, 그리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실험이 가진 진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이런 욕망은 우리를 미래로 이끄는 핵심적인 안내자입니다.
둘째, 분명한 것은 최근에 일어난 이 모든 ‘리더 없는’ 운동들의 패배가 정치적 리더십이라는 낡은 중앙집중적 모델, 즉 전위와 관료주의적 당 구조를 통해 존재했었던 모델로 후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리더십 모델은 우리의 유일한 선택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셈블리>에서 제기했던 문제는 간단히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행할 수 있게 되었는가? 그들은 어떻게 사회적 삶을 공동으로 구축하려고 협력할 수 있는가? 그들은 어떻게 핵심적인 정치적 쟁점들을 함께 결정할 수 있는가? 이를 위해 필요한 사회구조는 무엇인가? 그래서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 내부에서 사적 소유의 지배, 금융통치, 자본주의 지배를 벗어나는 다중의 민주주의를 위한 잠재력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밝히고 또 탐구하고자 했습니다. 오래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자본주의 사회는 발전을 앞당기기 위해서 바로 그 사회를 전복하는데 쓰일 무기를 반드시 제공한다고 선언했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과제는 이 무기를 발견하고 그 사용법을 익히는 데 있습니다.
-책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표현들이 여럿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다중이 새로운 군주’ ‘다중의 기업가정신’과 같은 표현들이 그렇습니다. 맥락을 모르고 보면 모순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다중과 군주는 대립하는 존재이고, 기업가정신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이 만든 자본이 자기 갱신을 위해 만든 개념이기도 합니다. 기존 개념을 뒤집은 용어들을 어떠한 의도에서 가져왔는지 독자들에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독자들이 아이러니를 즐기길 바랍니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과거에는 아첨꾼들이 왕을 받들고 숭배했습니다. 다른 더 고귀한 저자들은 자연의 영광을 노래하고, 숲과 산을 숭배했었죠. 우리는 혁명가들, 즉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자기 삶을 바친 이들의 위엄과 아름다움을 칭송하는데 더 마음이 기울어 있습니다. 우리는 전통적인 관습과 태도를 새로운 방향으로 돌려놓았을 뿐입니다.
우리가 다중의 기업가정신을 긍정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기업가정신이 어떻게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의 무기가 되었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기업가정신은 빈자가 겪는 가난을 빈자 스스로 ‘책임질 수 있게’ 만들려고(그리고 부자에게 돈을 모아주려고) 사회복지 구조를 제거하는 데 쓰이는 암호가 되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술가나 교사라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 기업가정신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할 때 조만간 지원금을 삭감하려 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업가정신이라는 개념을 가져오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요? 기업가정신은 실제로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협동에 기초한 과감한 노력을 의미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모두에게서 발전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가령 오늘날의 여러 정치 조직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 집에서 쫓겨나지 않게 막아서고, 또 사람들이 살 수 있게 텅 빈 소유지를 점거합니다. 다중의 기업가정신이란 이처럼 사적소유를, 공유될 수 있는 공통적인 것으로 변형하는 일을 말합니다.
-책에서 사회적 투쟁의 방식으로 ‘사회적 파업’(social strike)이 제안됩니다. 사회적 파업의 구체적 형태를 제시해줄 수 있으실까요. 현 자본주의 시스템을 멈추는 사회적 파업이 실제로 어떻게 구현되고, 나타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우리가 말한 ‘사회적 파업’을 가장 가깝게 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사회운동의 조직 및 행동을 노동조합의 것과 합쳐서 만든 잡종(hybrid)을 떠올리길 권합니다. 마치 기존의 두 다른 색 장미를 교배시켜 만든 다양한 색깔의 새로운 장미처럼 말이죠. 노동파업이 그랬듯 단일한 공장의 생산가동을 중단시키는 것과는 달리, 사회적 파업은 메트로폴리스 아니 사회 전체를 기능 정지시키는 것입니다.
일례로 지난 3월8일 ‘세계여성의 날’ 시위에 맞춰 일어난 멕시코의 페미니즘 시위 ‘여성 없는 날’을 생각해보십시오. 여성들은 하루 동안 임금노동과 공짜노동을 모두 거부함으로써 사회 대부분의 기능을 정지시켰습니다. 시위의 목적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여성 학살(femicide)을 부각시키는 데 있었지만, 그것은 또한 젠더화된 사회적 생산으로서의 여성노동이 생산에서 필수적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시야에서 사라지곤 한다는 점을 폭로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가부장제를 인식하게 만드는 교육적 경험이었던 것이죠. 최근에 라틴아메리카 곳곳에서 일어난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 파업’을 실험했으며, 이것은 사회적 파업이 구현되는 하나의 강력한 형태입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코로나19)이 전 지구적 위기를 불러오고 있습니다. 기존 통치 권력의 무능이 드러나는 한편, 이러한 역병에서도 가장 주목받고 이야기되는 것은 경제와 자본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바이러스의 전 지구적 유행과 당신들이 이야기하는 제국적 상황에서 어떤 상관성을 찾을 수 있을까요. 또한 금융시장이 출렁대고 경제 위기로 발전되는 위기가 뜻밖에도 바이러스로 나타났습니다. 문제가 ‘화폐’로부터 찾아왔다면 그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시위를 할 텐데 그럴 수 없는 상황입니다.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봐야할까요.
=이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현재 위기에서는 너무 이르며, 실재 상황은 좀 더 뒤에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이러한 ‘팬데믹’ 이후 새롭게 조성될 전 지구적 상황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입니다.
판데믹에 의해 더 확실해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국민국가가 더 이상 전 지구적 사태를 다스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20년 전 <제국>에서 우리가 세웠던 가설이었습니다. 즉 국민국가는 강력하지만(그리고 몇몇 국가는 다른 국가들보다 더 강력하지만), 출현하고 있는 전 지구적 질서에서 국민국가는 다층적이고 혼합된 구성의 한 요소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이죠. 최근에 국민국가 권력으로의 귀환이나 국가 주권을 다시 내세우는 것에 대한 이야기, 가령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브렉시트, 그밖의 유사한 여러 주장 등이 있었죠. 하지만 오늘날 가장 강력한 국민국가조차 전 지구적 체계에서 일방적이라거나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환상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물론 국경선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앙을 지켜보는 중인데, 이 재앙은 전 지구적 규모의 조율과 상관없이 코로나바이러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일국 단위의 정부들이 야기한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도 얘기했듯이 이러한 점이 분명히 드러났으며, 이는 현재의 위기에서 중요한 결과들을 초래했습니다.
마음에 새겨야할 또 다른 기본적인 사실은 이러한 시기에 집단행동과 시위를 조직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하는 점입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우리가 통상적으로 제시했던 레퍼토리는 조직하고, 함께 모이고, 시위하고, 유익한 사회변화를 위한 수단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판데믹은 반-사교적(a-social) 위기입니다. 즉 판데믹은 바로 이렇게 함께 모이는 방식, 모든 대규모 사회운동이 가진 기본적인 사회성을 봉쇄합니다. 바이러스는 공통적인 것, 즉 우리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을 공격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각국의 정부가 어떤 조치를 내렸는지를 비판하는 식의 위기에 대한 사회적 대응(의 목소리)은 다음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는 충분히 표출되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판데믹 기간 동안에는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분석이 우리의 사회세계나 정치세계에게 요구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장 얘기될 필요가 있는 일의 표면을 살짝 건드리는 정도로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재난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나오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앞서 ‘보장소득’의 필요성을 이야기했습니다. 재난기본소득과 당신들의 보장소득이 딱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위기가 보장소득을 실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또한 재난기본소득이라는 것은 투쟁이랑 괴리된, 권력이 자발적으로 분배하는 돈입니다. 당신들의 보장소득 제도화 요구와 어느 정도 일치하고 어느 정도 상충한다고 보십니까.
=이 시기 여러 나라들에서 실험되는 다양한 형태의 재난기본소득은 (우리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제안한 것과 같은) ‘무조건적인 보편적 기본소득의 보장’을 상상하는 길을 여는 일이 가능할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판데믹은 인구 대부분의 불안정성과 취약성에 한 줄기 빛을 드리웁니다. 이들은 판데믹 이전에 이미 불안정하고 취약했으며 앞으로 오랫동안 그럴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기본소득의 최초의 경험이 미래의 영구적이고 보편적인 미래의 시스템을 제도화하는 길을 열 것이라고 희망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보편적 기본소득의 수립을 혁명적 변화로 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정당하고 인도적인 개혁이며,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발생하는 욕구와 부조리에 대응할 수 있는 하나의 개혁입니다. 이러한 개혁들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 열망은 보다 더 높은 곳에 있습니다.
-네그리·하트의 책을 읽는 것은 오늘날 전 지구적 상황의 흐름을 읽는 것이기도 합니다. 향후 집필 계획이 있으십니까?
=네, 물론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한 권의 책을 쓰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는 늘 책을 씁니다. 그것은 우리의 함께 있음의 방식이며, 우리 우정의 조건입니다. 하지만 책의 개요를 알려드리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틀림없이 우리는 당신이 오늘 우리에게 제기했던 여러 쟁점들을 다루려고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한국의 사회투쟁들이 보인 끈기와 독창성에 오랫동안 감탄하며 바라봐 왔습니다. 독재에 맞선 투쟁, 학생운동, 노동자 투쟁, 부패에 맞선 시위, 민주주의 운동 등등을 말이죠. 우리는 한국의 투쟁들이 다가올 시기에 어떻게 발전할지, 그리고 이 투쟁들이 우리의 공유된 미래를 위해 어떤 새로운 교훈을 가르쳐줄지에 대해 간절히 배우고자 합니다.
원문보기:
네그리·하트 <어셈블리> 인터뷰/ 배문규 경향신문 기자
“한국 사회투쟁들이 보인 끈기와 독창성에 감탄”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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