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양 서산 둘레길 산책. 숲길을 걷는데 누가 머릿속에서 묻는다. 너한테 있는 것들 가운데 누구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있느냐? 답한다, 없습니다. 이 몸조차도 얼굴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어버이로부터 받은 것인데 다른 것들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렇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렇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을 네가 순간마다 기억하는 것이다. 그래야 네가 네 것 아닌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너는 크다. 누가 그것들을 너에게 준다 해도 네가 받지 않으면 어떻게 줄 수 있겠느냐? 이 사실도 아울러 기억하여라. 그래야 네가 삶과 죽음에 옹졸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옴(). (2020. 2. 7)
⎈ 꿈결에 한 말씀 들린다. “에고는, 누구의 에고든 간에, 미워할 대상이 아니다. 차라리 고마워할, 하지만 그것에 속지 않도록 조심할 대상이다.” ―그대로 잠자리에 누워 생각한다. 그렇다. 빛이 있으려면 그것으로 비출 대상이 있어야 한다. 별과 별 사이의 캄캄한 밤하늘처럼, 비출 대상이 없으면 어디에도 없는 것이 빛이다. 빛이 무엇을 비춘다는 건 그 무엇이 빛의 진행을 거스른다는 뜻이다. 빛이 저를 거스르는 무엇을 만들어 그것으로 저를 있게 한다. 그러나 빛이 비추는 모든 대상이 진짜로 존재하는 실상이 아니라 임시로 있는 척하다가 사라지는 허상들이다. 우주에 영원히 빛나는 별 없다. 그러므로 그것들에 속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사랑도 그렇다.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덧없는 사랑 없이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 수 없다. 붓다를 거스르는 아상(我相) 없이는 해탈도 자비도 없는 것이다.
⎈ 졸업생인 어진, 다은, 승희가 다녀간다. 제법 아가씨 자태를 풍긴다. 그럴만하다. 고등학생 아닌가? 승희가 묻는다. 할아버지한테는 어떤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에요? 답한다, 나에게는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제대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다. 밤, 부모 배움에 다녀옴. 학교 도서관이 그들먹하다. 고마운 사람들. (2020. 2. 14)
⎈ 예배 마치고 버스로 내려오는데 텔레비전이 줄곧 코로나 얘기만 한다. 저건 한님이 인류에 주시는 선물이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사람들로 하여금 피차 경계하고 멀어지게 하지만 현실로는 너희가 만든 온갖 울타리와 장벽이 아무 소용없는 시대가 다가왔다는, 그러니까 ‘나 혼자’ 존재한다는 미망(迷妄)에서 벗어나라는 메시지 아닌가? 사람들이 얼마나 알아들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국경도 이데올로기도 끝장났다는 사실을 깨치고 받아들일 것이다. 모두가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진실에 눈을 뜰 것이다. 무위당 선생께서 처음 난을 쳐주시며 화제(畵題)로 적어두신 글귀가 생각난다. 광풍미천청향전(狂風彌天淸香傳)이라, 미친바람이 하늘 가득 맑은 향기를 옮기도다. 아무래도 한님은 사람에게 병 주고 약 주시는 분 같다. 그 과정에 한 걸음씩 인류의 의식을 진화시키시면서. (2020. 2. 23)
⎈ 남산 종주. 옥천에서 올랐다가 월골 약수터 들러서 내려오니 월곡동이다. 사람들이 산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 하루에 천만 장을 생산하는데 시중에서 마스크 구하기가 어렵단다. 코로나보다 코로나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오늘 살면서 내일의 무엇을 미리 겁내는 것은 그만큼 하느님 아버지를 믿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예배시간에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으니…”를 입술로만 나불거린다는 얘기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무서워서 스스로 하느님을 의심하는 비열한 존재로는 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가능하면 입 가리개를 하지 않겠다. 이건 위생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신뢰문제다. 그러다가 코로나에 걸린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거니와 그 또한 “주께로부터 온 모든 것”에 포함되니 그저 고맙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다가 죽게 되면? 죽는 거지! 그래도 경우에 따라 마스크 쓸 자리에서는 쓰리라. 이유는 코로나 때문이 아니라 그러잖아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괜한 심려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다. 이번 코로나를 통하여 내리시는 하늘 메시지를 인류가 알아듣기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2020. 2. 26)
천주교에서 당분간 코로나 확산을 피하여 미사를 중단한단다. 개신교도 몇몇 교회들이 주일예배를 드리지 않기로 했나보다. 흠― 사람 때문에 안식일 있는 거지 안식일 때문에 사람 있는 게 아니라는 스승님 말씀의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섬겨온 ‘주일성수’라는 우상을 이렇게 무너뜨리시는 건가? (2020. 2. 28)
*이 글은 순천사랑어린학교 교장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에 실린, 아무개 이현주 목사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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