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그레이, 코로나19 위기가 역사의 전환점인 까닭/번역 김수빈
세계화의 시대는 끝났다. 방역의 최전선에 서지 않은 이들은 생각을 정리하고 변화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할 때다.
황량했던 거리엔 다시 사람들이 북적일 것이다. 우리는 스크린 불빛이 밝히는 은신처에서 나와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가 평시에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곳이 될 것이다. 이것은 안정적인 평형 상태에서 잠깐 파열이 일어난 것과는 다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위기는 역사의 전환점이다.
세계화의 시대는 끝났다. 전세계에 걸친 생산과 긴 공급망에 의존했던 경제 체제는 이제 그보다 덜 연결된 체제로 변모하고 있다. 멈추지 않는 이동성의 추동을 받으며 살던 삶의 방식은 이제 멈추고 있다. 우리의 삶은 이전보다 보다 물리적 구속을 받기 시작했고 보다 가상화되고 있다. 더 파편화된 세계가 탄생하고 있다. 이 세계는 어떤 의미에서 이전보다 더 탄력적resilient일 수도 있다.
한때 강력했던 영국이란 국가는 급속도로 재편되고 있다. 그것도 전례없는 속도로. 의회가 승인한 비상권한으로 정부는 정통 경제학을 내던져버렸다. 수 년 간의 어처구니없는 긴축 재정으로 NHS는 (영국의 군, 경찰, 교도소, 소방서, 간병인, 청소부와 마찬가지로) 사면초가다. 그러나 종사자들의 숭고한 헌신으로 바이러스는 차단될 것이다. 우리의 정치 체제는 별탈없이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이만치 운이 좋을 나라들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세계 곳곳의 정부들은 바이러스를 억제하는 것과 경제를 망가뜨리는 것 사이의 좁은 길을 통과하려 애쓰고 있다. 여럿이 실패하고 무너질 것이다.
진보적 사상가들이 보는 미래에 대한 관점에서 미래는 최근 과거의 아름다운 버전이다. 이것이 이들로 하여금 뭔가 이성 비스므리한 걸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리라는 건 틀림없다. 이는 또한 현재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을 해치기도 한다. 바로 적응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출하는 능력이다. 앞으로의 과제는 글로벌 마켓의 아나키에 노출됐던 지금의 것보다 더 견고하고 보다 인간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경제와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는 소규모의 지역 중심주의로의 전환을 뜻하는 게 아니다. 자족적인 지역주의가 가능하기엔 인구가 너무 많으며 대부분의 인류는 먼 과거의 소규모 폐쇄 공동체로 돌아가길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 수십 년간의 초세계화의 시대도 이젠 돌아오지 않는다. 바이러스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짜기운 경제 체제의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냈다. 자유자본주의liberal capitalism는 망가졌다.
‘자유’와 ‘선택’을 운위하는 자유주의는 기실 사회적 결집과 정치적 정당성의 전통적인 근원을 해체하고 이를 물질적 생활수준의 상승의 약속으로 대체하는 실험이었다. 이 실험은 완결됐다. 바이러스를 억제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경제의 셧다운을 수반한다. 이는 한시적일 수밖에 없고 경제는 곧 재개되겠지만 이제 그 경제가 펼쳐지는 세상은 정부가 글로벌 마켓을 억제하는 곳이 될 것이다.
세계 어디서나 필수적인 의료 장비의 다수가 중국 또는 다른 단일 국가에서만 공급되는 상황은 이제 용인되지 않을 것이다. 의료 장비와 그밖의 민감한 부문의 생산은 국가안보의 일부로 다뤄져 다시 국내로 돌아올 것re-shore이다. 영국 같은 나라는 농업을 없애버리고 식량을 해외 수입에 의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원래부터 그러했듯) 말도 안되는 소리로 치부될 것이다. 사람들이 이동을 줄이면서 항공 산업은 위축될 것이다. 세계의 국경은 보다 견고해질 것이다. 이제 정부는 경제적 효율성이라는 작은 목표를 추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물질적 생활수준의 증대’ 대신 사회의 기반이 될 것인가? 녹색 사상가들이 제시하는 한 가지 답은 존 스튜어트 밀이 <정치경제학원리(1848)>에서 ‘정체 상태 경제stationary-state economy‘라고 일컬었던 것이다. 생산과 소비를 증대시키는 게 더는 지상목표가 되지 않고 인구의 증가는 억제된다. 오늘날의 리버럴들과는 달리 밀은 인구 과다의 위험성을 인식했다. 그는 인간으로 가득한 세상은 ‘꽃이 가득한 황야’와 야생이 없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썼다. 그는 또한 중앙집권적 계획의 위험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정체 상태는 경쟁이 장려되는 시장경제가 될 것이었다. 기술 혁신은 삶의 기예의 발전과 함께 계속될 것이었다.
이는 여러 측면에서 매력적인 비전이지만 또한 비현실적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는 바이러스와 싸울 세계적 규모의 권위체가 없는 것처럼 성장의 종언을 강제할 세계적 규모의 권위체가 없다. 진보가 주문처럼 외우는 (최근에는 고든 브라운이 반복한) 것과는 달리, 글로벌한 문제에 언제나 글로벌한 해결책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지정학적 대치는 세계정부 같은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만일 그런 게 존재했다면 기존의 국가들이 그것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할 것이다. 지금의 위기가 전례 없는 국제적 공조를 통해 해결 가능하다는 믿음은 그야말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주술적 사고다.
물론 경제적 확장은 무한정 지속가능하지 않다. 한 가지를 들자면 이는 기후변화를 악화시킬 따름이며 지구를 쓰레기장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나 매우 불평등한 생활수준과 여전히 늘어나는 인구, 그리고 격화되는 지정학적 대치 속에서 제로 성장 또한 지속가능하진 않다. 만일 성장의 한계가 마침내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은 정부가 자국민의 보호를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주의이건 권위주의이건 이 홉스적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는 국가는 실패할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지정학적 변화를 돌연히 가속화했다. 유가의 폭락과 더불어 통제를 벗어난 바이러스의 전파는 이란의 신정주의적 정권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 원유 수익이 급감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도 위험하다. 많은 이들이 두 나라의 정권이 사라지길 바라마지 않으리란 건 틀림없다. 그러나 걸프의 붕괴가 장기간의 혼돈 이상을 가져오리란 보장은 없다. 오랫동안 수익 다각화를 얘기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두 정권 모두 여전히 원유의 인질이며 유가가 어느 정도 회복하더라도 글로벌 셧다운의 경제적 타격은 엄청날 것이다.
반면에 동아시아의 약진은 틀림없이 계속될 것이다. 지금껏 코로나19에 가장 성공적으로 대응한 나라는 대만, 한국, 싱가포르였다. 개인의 자율성보다 집단의 안녕을 중시하는 문화적 전통이 이들의 성공에 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기란 어렵다. 이들은 또한 최소국가(야경국가)의 숭배를 거부했다. 이들 국가가 다른 서구 국가보다 탈세계화에 더 잘 적응한다 하더라도 놀랍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위치는 보다 복잡하다. 은폐와 불투명한 통계 때문에 중국이 팬데믹에 얼마나 잘 대응하고 있는지를 평가하기란 어렵다. 분명 어떠한 민주국가라도 중국을 모범으로 삼지는 않을 것이며 그래서도 안 된다. 런던의 NHS 나이팅게일 병원의 사례가 보여주듯 권위주의 정권만이 병원을 2주만에 지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누구도 중국의 봉쇄로 인한 인적 피해의 전모를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진핑 정권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부터 수혜를 입은 듯 보인다. 바이러스는 감시국가를 확장하고 보다 강력한 정치적 통제를 행할 근거를 제공했다. 시진핑은 이번 위기를 내버려두지 않고 자국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 쓰고 있다. 중국은 이탈리아처럼 곤란에 빠진 국가 정부를 지원함으로써 스스로를 유럽연합의 위치에 넣고 있다. 중국이 지금껏 지원한 마스크와 검사 키트는 부실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이것이 중국의 프로파간다 캠페인에 흠집을 내진 못한 것 같다.
유럽연합은 자신의 본질적인 약점을 드러내며 위기에 대응했다. ‘주권’만큼 지성인들이 경멸해마지 않은 개념도 없다. 현실에서 주권이란 영국과 다른 나라에서 시행된 것과 같은 종류의 포괄적이고 통합적이며 신축적인 긴급 대책으로 드러난다. 현재까지 시행된 조치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 시행됐던 그 어떤 조치보다도 그 규모가 크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측면에서 지금의 조치는 그때 당시의 조치의 정반대에 있다. 전쟁 당시에는 영국 국민들이 전례 없는 규모로 동원됐고 실업은 급격히 줄었다. 오늘날, 필수적인 업무에 종사하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영국의 노동자들은 동원이 해제되고 있다. 만일 이 상황이 수개월 이상 지속되면 봉쇄 조치는 경제를 더 큰 규모로 사회화할 것을 요하게 될 것이다.
유럽연합의 핏기 없는 신자유주의적 구조가 이런 것을 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지금껏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원칙들이 유럽중앙은행의 채권매입(양적 완화)과 산업 국가보조금 제한의 완화로 무너졌다. 그러나 독일과 네덜란드 같은 북부 유럽 국가들이 재정 부담을 공동 부담하기를 거부하여 이탈리아 같은 (그리스처럼 망하게 두기에는 너무 크지만 한편으론 그만큼 구제하는 데 너무 많은 비용이 들) 나라를 구제할 방법이 막힐 수도 있다. 이탈리아의 총리 주세페 콘테는 지난 3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유럽이 이 전례 없는 도전에 맞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유럽연합 전체는 그 존재의 이유를 잃게 됩니다.” 세르비아 대통령 알렉산데르 부치치는 보다 현실적이고 더 퉁명스럽게 말했다. “유럽연합의 연대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동화 같은 이야기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우릴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나라는 중화인민공민국이다. 다른 나라에겐 하나도 고마울 게 없다.”
유럽연합의 근본적인 결함은 국가가 갖는 보호 기능을 다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유로존의 붕괴는 너무나 자주 예견되곤 해서 이제는 생각할 가치가 없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유럽연합이 오늘날 맞닥뜨리고 있는 부담을 볼 때, 유럽연합의 붕괴는 비현실적이지 않다. 이동의 자유는 이미 사라졌다. 터키의 대통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은 최근 난민들이 자국 국경을 통과할 수 있게 하겠다며 유럽연합을 협박했고 시리아 이들리브에서 벌어지는 종반전이 수십만 혹은 수백만의 난민을 유럽으로 유입시킬 수 있다. (거대하고 밀집된 데다가 불결한 난민 캠프에서 사회적 거리두기가 어떤 의미가 있을지 알기란 어렵다.) 이미 삐걱대는 유럽연합에 또 다른 난민 위기가 닥치면 치명적일 수 있다.
만일 유럽연합이 살아남는다면 말기 신성로마제국과 비슷한 모양새일 수도 있다. 허깨비 같이 지속되면서 실제 권력은 다른 곳에서 집행되는 꼴이다. 중대하고 필수적인 결정은 이미 국민국가들이 내리고 있다. 중도파는 더 이상 정치 주도 세력이 아니고 좌파의 상당수가 실패한 유럽연합 기획에 여전히 묶여 있는 사이에 극우파가 여러 정부들을 장악할 것이다.
유럽연합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앞으로 점차 늘어날 것이다. 2020년 3월의 유가 폭락을 촉발시킨 사우디와의 다툼에서 푸틴은 보다 우세하게 싸움을 이끌었다. 사우디가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고 국가 채무 상환 능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재정적 손익분기점이 배럴당 80달러 가량인 반면 러시아는 그 절반 가량이면 충분할 수 있다. 동시에 푸틴은 에너지 대국으로서의 러시아의 지위를 굳히고 있다. 발틱해를 가로지르는 노드스트림 가스관은 유럽에게 안정적인 천연가스 공급을 보장한다. 바로 마찬가지 이유로 이 가스관들은 유럽을 러시아에게 의존하게 만들며 러시아가 에너지를 정치적 무기로 활용할 수 있게 한다. 유럽이 발칸반도화 되면서 러시아 또한 자국의 영향력을 넓히려 한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러시아는 이탈리아에 의료진과 장비를 보내면서 흔들리는 유럽연합을 대체하려 하고 있다.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노골적으로 경제를 다시 부양시키는 걸 바이러스를 막는 것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1929년을 연상시키는 증시 폭락과 1930년대보다 심각한 실업률은 그의 대통령직에 실존적 위협이 될 수 있다. 제임스 불라드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미국의 실업률이 대공황 시절보다 높은 30%까지 달할 수 있다고 추정했다. 한편 미국의 분산된 정부 체제와 파괴적일 정도로 비싸 수천만 명이 의료보장을 받지 못하는 의료 시스템, 거대한 숫자의 (상당수가 늙고 허약한) 교도소 수용인원, 도시에 넘쳐나는 노숙자, 이미 심각한 상황인 진통제 남용 등의 문제에 비추어 볼 때 셧다운을 단축하면 바이러스가 통제 불능 수준으로 확산되어 끔찍한 결과를 일으킬 수 있다. (이런 위험을 부담하는 게 트럼프 혼자만은 아니다. 스웨덴은 지금까지 다른 나라에서 강제한 셧다운 비슷한 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았다.)
영국의 구제 대책과는 달리 트럼프의 2조 달러짜리 부양책은 대체로 또 다른 기업 구제금이다. 그럼에도 여론조사를 보면 그가 코로나19 사태를 다루는 방식을 지지하는 미국 국민들이 늘고 있다. 만일 트럼프가 이 파국을 딛고 미국인 대다수의 지지를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트럼프가 권력을 유지하든 그렇지 않든, 세계에서 미국의 지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다. 빠르게 되감기고 있는 것은 근 수십 년 동안의 초세계화 뿐만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 질서다. 바이러스는 상상 속에 있던 평형에 구멍을 내 오랫동안 진행 중이던 해체의 과정을 가속화시켰다.
그의 역작 <전염병의 세계사>에서 역사가 윌리엄 맥닐은 이렇게 썼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기생체가 평소의 생태환경을 벗어나 지구의 두드러지는 특징이 된 밀집된 인간 군체를 새롭고도 파괴적인 떼죽음에 노출시킬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코로나19가 어떻게 평소의 환경을 벗어나게 됐는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우한의 야생동물 시장이 역할을 했을 수 있다. 맥닐의 저서가 1976년 처음 출간됐을 당시 외래종 서식지가 파괴된 정도는 지금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감염병 전염의 위험 또한 늘어났다. 1918~20년의 스페인 독감은 대중 항공 교통이 없던 시절에도 글로벌 팬데믹이 됐다. 역사가들이 전염병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대해 맥닐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역사가에게도 때때로 발생하는 재앙에 가까운 전염병 창궐은 일상을 급작스럽게, 예측불허로 침범하는 것이었으며 본질적으로 역사적인 설명이 가능한 범주의 바깥에 있다.” 이후에 이뤄진 많은 연구들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그럼에도 팬데믹이 역사의 불가결한 요소라기보다는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관념은 건재하다. 여기에는 인간은 더 이상 자연세계의 일부분이 아니며 인간이 전체 생물생활권에서 분리돼 자율적인 생태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코로나19는 이들에게 그럴 수 없다고 말해주고 있다. 우린 과학을 사용해야만 이 전염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대대적인 항체 검사와 백신이 매우 중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미래에 덜 취약해지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대해 항구적인 변화가 불가피하다.
우리의 일상은 이미 변했다. 취약함의 감정이 도처에 널려있다. 단지 사회만 흔들리는 게 아니다. 세계에서 인간의 지위도 마찬가지로 흔들린다.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사진들은 여러 방식으로 인간의 부재를 드러낸다. 멧돼지떼가 이탈리아 북부의 마을을 배회하고 태국의 롭부리에서는 더이상 관광객이 먹이를 주지 않자 원숭이 패거리들이 길거리에서 먹이를 두고 싸운다. 바이러스로 텅 빈 도시들 속에서 비인간적인 아름다움과 삶의 치열한 투쟁이 발생했다.
이미 많은 논평가들이 특기했듯 J. G. 밸러드의 소설이 그린 대재앙 이후의 미래가 우리의 현실이 됐다. 그러나 이 ‘대재앙’이 무엇을 드러내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밸러드에게 인류 사회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무대 소품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의 본성 위에 세워진 듯 보였던 규범들은 당신이 무대를 떠나자 사라졌다. 밸러드가 유년기를 보냈던 1940년대의 상하이에서 가장 비참한 경험은 포로수용소에서가 아니었다. 수용소의 사람들은 대부분 의지가 있고 다른 사람에게 친절했다. 재치 있고 모험심이 넘치는 소년이었던 밸러드는 당시의 대부분을 즐겼다. 밸러드는 내게, 자신이 가차없는 이기심과 동기 없는 잔혹함의 최악을 목격하게 된 것은 전쟁이 끝나고 수용소가 무너졌을 때였다고 말했다.
그가 얻은 교훈은 그것이 세계가 끝장나는 사건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흔히 대재앙으로 기술되는 것들은 역사의 일반적인 과정이다. 많은 이들이 지속되는 트라우마를 안고 남겨진다. 그러나 인간이란 동물은 이런 격변에 의해 무너지기엔 너무나 억세고 능란하다. 삶은 계속된다. 단지 이전과 다를 뿐. 지금을 밸러드적인 순간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밸러드가 묘사하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적응하고 심지어 그 과정에서 성취감을 느끼는지를 포착하지 못한 것이다.
기술은 우리가 현재의 극단적인 상황에 적응하는 걸 도울 것이다. 물리적 이동은 우리가 하는 활동의 많은 부분을 사이버 공간으로 옮김으로써 줄일 수 있다. 사무실, 학교, 일반 진료소 등의 업무 시설들은 완전히 변화를 겪을 것이다. 전염병이 유행하는 동안 세워진 가상 공동체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이들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잘 알 수 있게 해줬다.
팬데믹이 잦아들고 나면 사람들은 서로 축하할 테지만 감염의 위협이 언제 끝나는지에 대한 정확한 지점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컨드 라이프> 같은 온라인 환경으로 이주해 그들이 선택하는 가상공간에서 그들이 선택한 신체를 가지고 사람들을 만나고 거래하고 교류하게 될 수 있다. 다른 적응 양식들은 도덕주의자들에게 불편할 수도 있다. 온라인 포르노는 큰 호황을 누리게 될 것이고 다수의 인터넷 데이트가 결코 신체적 접촉으로는 이어지지 않는 에로틱한 교류로 끝날 수 있다. 증강현실(AR) 기술이 신체적 접촉을 시뮬레이션하는 데 사용될 수 있으며 가상의 섹스가 곧 정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이것이 좋은 삶으로 가는 길인지 아닌지는 가장 유용한 질문이 아닐 것이다. 사이버 공간은 전쟁이나 자연재해로 손상 또는 파괴될 수 있는 인프라에 의존한다. 인터넷은 과거의 전염병들이 가져왔던 정도의 격리, 소외를 피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것이 인류로 하여금 자신의 필멸하는 육신을 벗어나거나 진보의 아이러니를 피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진보가 뒤집혀질 수 있다는 것(심지어 진보주의자들조차 이를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만이 아니라 진보가 스스로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명백한 사례를 들자면, 세계화는 상당한 성과를 창출했다. 수백만이 가난에서 벗어났다. 이러한 성과는 이제 위협을 받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탈세계화를 낳은 것은 바로 세계화다.
생활수준이 영원히 증대하리란 전망이 사라지면서 권위와 정당성에 대한 다른 원천들이 다시 부상하고 있다. 리버럴이든 사회주의자든 진보파의 정신은 국가 정체성national identity을 정열적으로 혐오한다. 국가 정체성이 어떻게 오용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는 역사에 차고 넘친다. 그러나 국민국가nation state는 점차 대규모 행위를 이끄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되고 있다. 방역은 보편 인류를 위한 대의로는 동원되지 않을 집단적 노력을 요한다.
이타성에는 성장만큼이나 그 한계가 뚜렷하다. 최악의 위기가 끝나기 전까지 예외적일 정도의 이타심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속속들이 등장할 것이다. 영국에서는 NHS를 돕기 위해 50만 명이 자원봉사자로 등록했다. 그러나 이 난관을 헤쳐 나가는 데 인간의 공감 능력에만 의존하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낯선 사람에 대한 친절함은 너무나 소중하기에 배급제가 필요하다.
여기서 보호자로서의 국가가 등장한다. 영국이란 국가는 언제나 뼛속까지 홉스적이었다. 평화와 강력한 정부는 늘 지상과제였다. 동시에 이 홉스적 국가는 대체로 동의에 기반했으며 특히 국가적 비상시기에 더욱 그랬다.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는 정부의 간섭으로부터의 자유를 압도했다.
팬데믹이 정점을 지난 후 사람들이 얼 만큼 자유를 돌려받기 원할까는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다. 사회주의의 강요된 연대에는 구미가 거의 당기지 않지만 어쩌면 자신들의 건강을 보다 잘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생체감시의 체제를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이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는 데는 더 많은 국가의 간섭을, 그것도 매우 창의적인 종류의 간섭을 필요로 한다. 각국 정부들은 과학연구와 기술혁신에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해야 할 것이다. 국가가 언제나 규모가 더 커지지는 않더라도 그 영향력은 널리 퍼질 것이며 구세계의 기준에 비춰보면 보다 개입적일 것이다. 포스트 자유주의 정부가 근미래에는 새로운 규범이 될 것이다.
자유주의 사회의 취약성을 인식하지 않으면 자유주의 사회의 가장 본질적인 가치를 보존할 수 없다. 공정과 개인의 자유가 여기 포함되며 개인의 자유는 그 자체로 정부를 견제하는 데 값어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자율성이 인간의 가장 내밀한 욕구라고 여기는 이들은 인간 심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과 다름없다. 특히 자기 자신의 심리에 대한. 기실 누구에게나 안전과 소속감은 자율성 못지않게 중요하며 심지어 그보다 더 중요할 때가 더 많다. 실인즉 자유주의란 이러한 사실을 체계적으로 부인하는 것이었다.
격리의 이점이란 새롭게 생각할 여지를 준다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잡다한 것들을 치우고 변화된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당면과제다. 우리 중 방역의 최전선에 서지 않은 이들에겐 그동안 이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원문:
John Gray is the New Statesman’s lead book reviewer. His latest book is The Soul of the Marionette: A Short Enquiry into Human Freedom.
이 기사는 2020 년 4 월 3 일 Spring New New Yorkman 특별 호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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